서울 수국사 주지 호산 스님
서울 수국사 주지 호산 스님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20.08.03 11:48
  • 호수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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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선원 수행결기 인도 만행결사 걸음걸음에 되새기리!”

무술고수 되려 선석사 입산
바랑 맨 스님 뒷모습에 출가

암자 격 상원사 주지 맡아
선풍진작 ‘용문선원’ 세워

서릿발 결기 서린 청규 속
극한고비 넘겨가며 정진

“이 순간 다시 오지 않는다!”
“회향 날, 당당히 나가자!”

‘말의 소중함’ 새삼 깨닫는
상월묵언 템플스테이 호응

​​​​​​​순례길에서 얻을 ‘그 무엇’
평생 간직할 최고보물 확신
서울 수국사 주지 호산 스님은 “걸식은 못 해도 절제는 하며 살아가려 한다”고 했다. 스님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아홉 개의 텐트 앞에 놓인 아홉 개의 방석에 아홉 스님이 가부좌를 틀었다. 침묵은 강처럼 고요히 흘렀고, 화두는 별처럼 또렷이 빛났다.

그 누구도 90일 정진 중에는 상월선원(霜月禪院)을 나갈 수 없다. ‘하루 한 끼 공양 14시간 정진, 그리고 묵언.’ 서릿발 결기 서린 이 청규를 끝내 감내하지 못해 비상문을 박차고 나가면 스스로 내건 약속에 따라 조계종 승려 자격을 잃는다. 삭풍에 얹어진 냉기가 뛰는 심장을 잡아채려는 순간이나, 공복에 꿈틀거리는 허기가 몸속에 남은 마지막 기운마저 앗아가려 할 때도, 비상문으로 눈길을 돌리기는커녕 태산의 무게를 더해 굳건히 앉았다. 이 길을 걸었던 선지식들이 증명해 보인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음이다.

‘고요하면 천 가지가 나타나고(靜也千般現)
움직이면 한 물건도 없네(動也一物無)
무(無), 무(無), 이 무엇인가(無無是什麽)
서리 내린 후 국화가 만발하네.(霜後菊花稠)’
(태고보우 시 ‘무제’, 석지현 역)

상월선원 입방 직전, “이 자리에서 내 몸은 말라버려도 좋다. 가죽과 뼈와 살이 녹아버려도 좋다.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라!” 천명했던 인산, 심우, 호산, 진각, 자승, 무연, 성곡, 재현, 도림 스님은 스스로 쳐놓은 철벽을 마주하며 품어 온 화두를 든 채 불산(佛山)이 되어 갔다.

그때, 서울 수국사 주지 호산(虎山) 스님은 ‘무(無)’자 화두를 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무술고수가 되고 싶어 허주 보원(虛舟 普願)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성주 선석사로 들어섰다. 소림무공 전수자이자 중국 황궁다법 보유자였던 중국 베이징 출신의 허주 스님은 해인사로 출가하며 귀화했다.(1957) 무술을 배우려면 삭발은 물론 ‘반야심경’ ‘천수경’ 등을 외우고 절 일도 거들어야 했으니 행자생활이나 다름없었다. 허주 스님은 자주 이르곤 했다.

“너는 출가할 상이야!”
“저는 무술만 배우면 됩니다.”

상월선원 아홉스님은 불산(佛山)이 되어갔다.

어느 날, 잠깐 쉬는 틈에 절 앞으로 난 긴 길을 바라보았다. 논밭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가에 한여름의 햇살을 온몸으로 안은 노송들이 그림자 하나씩 거느린 채 늘어서 있었다. 가만 보니 한 납승이 그 길을 따라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바랑 맨 운수납자의 뒷모습을 본 찰나 심연 속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허주 스님을 찾아뵈었다.

“출가 하겠습니다.”
“큰 절의 스승과 인연을 맺어라!”

절 앞으로 난 그 길을 따라 선불장(選佛場)으로 향했다. 그때 나이 열 네 살이었고 은사는 종진 스님과 맺어졌다.

엄중한 청규를 내건 상월선원이 위례신도시 허허벌판에 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직감했다.

‘목숨 건 가행정진에 뛰어들 유일무이한 기회다!’

통도사 강원 졸업 후 봉암사 수선안거 이래 11안거를 성만할 만큼 수좌의 삶을 걸었던 호산 스님은 상원사 용문선원을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남양주 봉선사에 머무를 때 일이다. 지대방에 모인 대중 스님들은 양평 상원사에 선원이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표하곤 했다. 지역 신도들의 발길조차 많지 않은 암자 격의 도량에 선원을 짓는다는 건 녹록치 않은 일이었지만 원력을 세웠다.

‘고려의 태고 보우(太古 普愚) 스님이 정진했던 도량이다. 선원을 짓자.’
 

상월선원 결사를 원만회향한 아홉스님.

2001년 4월 수선(修禪)의 공간 용문선원이 개원됐다. 본사인 봉선사는 물론 종단 차원에서도 새롭게 문을 연 선원이 경기도에 새로운 선풍(禪風)을 일으켜주기를 기대했다. 당시 고불총림 방장 서옹 스님(조계종 5대 종정)은 편액 ‘龍門禪院(용문선원)’을 직접 써 내려 보냈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선객이 운집했는데 해인총림 방장 법전(조계종 11·12대 종정) 스님은 법어를 통해 “세계가 무너져도 이 용문산은 안 무너지리라!”고 일갈했다.

상원사, 용문사를 거쳐 수국사 주지 소임을 보면서도 선심(禪心)만은 잃지 않고 있었기에 상월선원 용상방에 자신의 법명을 올릴 수 있었을 터다.

2019년 11월11일 동안거 입제와 함께 시작한 상월선원 결사는 2020년 2월 7일 회향했다. 그동안 10만여 대중이 상월선원을 찾았고, 울타리에는 6만여개의 연등이 달렸다. ‘코로나 사태’를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인파가 찾은 것인데 이는 아홉 스님이 세운 ‘상월선원 정진결사, 한국불교 중흥결사, 대한민국 화합결사, 온 세상 평화결사’에 불교계 사부대중이 공감했음을 방증한다.

‘철커덕!’ 하고 자물쇠가 채워진 직후 직감했을 법하다. 상월선원 안과 밖의 시공간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자물쇠는 입실 직전까지도 자유롭게 주고받던 ‘말’을 완벽히 잠갔습니다. 그 이후 선원장 무연 스님이 치는 죽비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습니다. 그 소리에 앉고, 서고, 걷고, 공양하고, 잠에 들었습니다. 처음 한 달 정도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했는데, 그 이후는 의외로 빨리 가는 듯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느리다, 빠르다’는 것도 인식할 수 없었습니다.”

무연 스님은 비구계를 함께 받은 도반이고 통도사 강원에서 함께 공부했다. 용문선원 개원 때도 방부를 들인 바 있다.

“40년 가까이 맺어온 인연입니다. 평생 동안 일말의 흐트러짐 없이 수좌로서의 삶을 올곧이 살아온 무연 스님을 저는 존경합니다. 잠깐의 휴식 때 나눈 필담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일상에서는 상월선원 청규를 내걸고 정진할 수 없다. 이 순간, 다시 오지 않는다. 도반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 가슴 뭉클 했습니다.”

12월에 들어서며 기온은 영하 10도, 낮에는 영상 20도를 기록했다. 풍찬노숙을 실감케 했다. 심한 온도차에 천막은 특유의 쾌쾌한 냄새를 쏟아냈고, 그것들은 허기진 수행자들의 폐부로 밀려들어가 정진 속 순연했던 호흡을 끊어놓곤 했다.

“도시락과 함께 전달된 ‘쪽지’를 통해 사부대중이 매일 천막법당을 찾아 기도하고, 상월선원과 유사한 체험관에서 수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간단없는 정진을 북돋아주는 큰 힘이었습니다. 해제 한 달 전쯤, 다각 소임을 맡아주셨던 회주 자승 스님께서 게시판에 글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회향하는 날, 이 문 부수고 당당히 나가자!’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수국사 ‘상월묵언 템플스테이’는 말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호산 스님은 지난 5월 수국사에 ‘상월묵언(霜月默言) 템플스테이’ 특별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90일 정진 회향 후 푹 쉬었습니다. 그러다 나태해진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극한의 고비를 넘어선 내공자라도 방심한 채 ‘수행 궤도’에서 이탈하면 정진력은 금세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게으름이 똬리를 틀 수 있음을 새삼 인식했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상월선원 정진은 추억으로만 남을 듯싶었습니다. 1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전화기 꺼놓고 정진하자고 다짐하고는 실천에 옮겨보았습니다. 주지라 해도 못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불자들도 일주일 혹은, 한 달, 일 년에 한 번은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절에서 준비해 놓은 텐트에 머물며 묵언, 108배, 걷기명상, 좌선을 이어가는 ‘상월묵언 템플스테이’ 호응은 의외로 컸다.

“체험한 분들이 다양한 경험담을 털어놓았는데 무엇보다 묵언을 통해 말의 소중함을 알았다고 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며 살았구나!’ ‘함부로 던진 말이 상대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구나!’ 나뿐 아니라 상대의 마음도 헤아리는 지혜를 얻었으니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호산 스님이 직접 지도한다.

상월선원은 두 번째 결사를 준비하고 있다. 부처님 성지 1080km를 하루 30km씩 걸어 45일 만에 완주하는 고행이다. 상월선원 결사와는 달리 ‘길’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함께하는 결사인데 호산 스님이 ‘총도감’을 맡았다.

“바람, 풀, 꽃, 사람! 우리나라 어느 절에 가더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리수를 향해 걷다가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법을 설하신 숲속으로 들어가다 안을 바람입니다.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설한 영취산이 자리 한 마을에 머물며 바라 볼 풀과 꽃입니다. 그 순간 생성되는 감흥과 사유는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감흥의 정도, 사유의 폭과 깊이가 어떻든 그곳에서 얻은 ‘그 무엇’은 그 누구도 엿볼 수조차 없는 자신만의 ‘최고 보물’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무술고수가 되고 싶어 집을 나섰던 10대 소년의 걸음은 강원과 선방, 상월선원을 거쳐 인도 성지로 향하고 있다. ‘문 없는 문’을 열어가며 새로운 여정에 몸을 맡겨가고 있는 호산 스님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지남으로 삼는다는 호산 스님에게 혹, 심중에 둔 불사(佛事)가 있는지 여쭈어 보았다.

“종단과 관련한 모든 소임을 놓을 즈음 자연과 어우러진 아담한 사찰 하나 조성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사부대중과 함께 책 읽고 기도하며 명상에 들고 싶습니다. 때로는 산사음악회를 열어 선율에도 심취해 보고자 합니다!”

긴 여정 끝에서 마주하고 싶은 그 도량이 누군가에게는 분명 ‘선불장’으로 다가설 것이다.

사부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부탁드렸더니 자신에게 건 ‘약속’을 내어보였다.

“걸식은 못 해도 절제는 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스님으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호산 스님이 걸어왔고, 걸으려 하는 길 위에 화합과 평화가 깃들어 있음을 알겠다. 온 세상의 사람이 바라는 희망이자 부처님께서 전한 ‘법’이기도 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호산 스님은
통도사 강원 졸업. 봉암사 수선안거 이래 11안거 성만. 동국대 불교대학원 최고경영위과정 수료. 상원사·용문사 주지 역임. 현재 서울 수국사 주지이자 광동학원·동국대학교 이사이다. 또한 조계종 중앙종회의원(16·17대)이자 종회사무처장이며 사)이웃을돕는사람들 이사장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장(2010)과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템플스테이 공로 표창장(2014)을 받았다.

 

[1548호 / 2020년 8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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