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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지식과 진리

참된 믿음도 이치에 맞게 정당화돼야 지식

명제는 사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진위가 결정
진실과 진리 혼동하면서 여러 가지 철학적 문제 생겨나
진리란 “~한 주장은 참이다”처럼 술어형태 이해가 옳아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앎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내가 ‘인천은 서울의 서쪽에 있다’는 점을 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서양에서는 이미 플라톤이 그의 대화록에서 앎 또는 지식(knowledge)의 속성을 논의했다. 현대인식론은 플라톤의 분석이 완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지만, 전통적으로 지식은 그의 논의대로 ‘정당화된 참된 믿음(justified true belief)’으로 정의되어 왔다. 이 정의는 우리 상식에 맞는다.

우리는 먼저 믿고 받아들여야 알 수도 있다. ‘인천이 서울의 서쪽에 있다’는 점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인천이 서울의 서쪽에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어떤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을 우리는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이라고 믿더라도 그것이 참이 아니라고 밝혀진다면 지식이 될 수 없다. 서양인들은 15세기까지 지구가 평평하다고 배우며 믿고 받아들였는데 “지구는 평평하다”는 참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지식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중세 서양 사람들이 ‘지구는 평평하다’는 점을 알았다고 할 수 없다.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려면 참이어야 한다.

참인 믿음이더라도 반드시 지식이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길동이가 꿈에서 트럼프 왼쪽 발바닥에 있는 흉측한 점을 보고 그때부터 트럼프 발에 그런 점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뜻밖에도 그 믿음이 참으로 드러난다고 해 보자. 길동이는 트럼프 왼쪽 발바닥에 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그렇지 않다. 꿈이라는 신뢰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얻은 믿음이 우연히 참이라고 해도 그것이 길동이의 지식이 될 수는 없었다. 알지 못할 이유로 굳게 믿은 로또 번호로 당첨되더라도 그 믿음을 정당화할 방법이 없으므로 당첨자가 그 로또 번호를 알았다고 볼 수 없다. 참된 믿음도 이치에 맞게 정당화되어야 지식이다.

이견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철학자들은 믿음의 개념과 정당화의 방법론을 우리가 대체로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철학자들도 참됨 또는 진리 자체를 논의하기는 난감해한다. 한자어 “진리(眞理)”는 영어 “truth”의 번역어로 쓰이는데, “truth”는 실은 ‘진리’보다는 ‘진실’에 가깝다. 미국인이나 영국인에게 ‘다윈의 진화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truth입니까?’라고 질문하면, 그들은 진실(truth)이 아니라 참된 이론 즉 진리(true theory)라고 답변한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 truth는 참된 이치라는 진리가 아니라 참된 사실이라는 진실이다. 그런데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에서도 ‘진실’과 ‘진리’를 혼동하면서 여러 철학적 문제가 생겨났다.

이웃종교에서 가르치는 “God is truth” 또는 “Jesus is truth”라는 명제는 철학적으로 혼란스럽다. 만약 “truth”를 ‘진리’로 이해한다면 “신은 진리다”와 “예수는 진리다”가 되는데, 둘 다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이다. ‘신과 예수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해야지, 신이나 예수라는 존재론적 대상(ontological entity)이 참된 이치라는 말은 뜻이 통하지 않는다. 은유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위는 진리다”나 “소나무는 진리다”와 같은 문장이 엉터리인 이유와 같다. 그런데 ‘truth’를 진실된 존재 또는 실재(實在)로 본다면 이런 문장들이 이해 가능해진다. 신과 예수 그리고 바위와 소나무가 실재한다는 주장은 그 진위(眞僞) 여부와 상관없이 최소한 뜻은 통하기 때문이다. 대승(大乘)에서 논하는 ‘법신(法身)’이나 ‘법계(法界)’도 ‘진리 그 자체’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실재’를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라면 이치에 맞지 않고 후자라면 공(空)에 어긋난다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존재하는 대상이 참이라고(true) 하면 이치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현대철학은 온전한 문장으로 표현되는 명제만 참 또는 거짓이라고 본다. “지구는 둥글다”와 “바닷물은 짜다”는 참인 명제들이고, “인천은 서울의 동쪽에 있다”와 “해는 서쪽에서 뜬다”는 거짓이다. “지구는 둥글다”라는 명제가 참인 이유는 그 명제가 ‘지구는 둥글다’라는 우리 세계의 사실에 제대로 대응하기(correspond) 때문이다. “한국은 동아시아에 있다,” “눈은 희다,” 그리고 “남극은 춥다”도 모두 각각의 사실에 옳게 대응해서 참인 명제들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것을 “그러하다”라고 또 그러하지 않은 것을 “그러하지 않다”고 말하면 참이고, 그러하지 않은 것을 “그러하다”라고 또는 그러한 것을 “그러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앞의 논의와 같은 구조의 견해다.

명제는 사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진위가 결정되고 또 그 내용과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철학적 문제가 있다. 명제가 사실에 옳게 대응하기 때문에 진리이고 또 의미를 갖는다면, 그런 대응관계(에 대한 명제)는 과연 무엇에 대응하기에 참이고 의미를 가질까? 이런 대응1관계(에 대한 명제)는 언어와 세계 사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응2되는 세계의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응2관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대응1관계(에 대한 명제)는 그 참·거짓이 결정될 수 없고 따라서 의미도 부여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대응관계도 그 자체로는 참이라고 말해질 수도 또 의미를 가질 수도 없다.

우리는 어떤 명제가 참이라고, 즉 진리라고 말한다. 진리란 “~~한 주장은 참이다” 또는 “~~한 가르침은 진리다”와 같이 원칙적으로 술어(predicate)의 형태로 이해되어야 옳다. 그리고 어떤 명제가 진리라는 말은 그것이 사실에 대응한다는 말이기 때문에, 명제를 진리로 만들어 주는 것은 사실과의 대응관계이다. 그래서 나는 “진리 그 자체”와 같이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리 그 자체”라는 말은 “명제와 사실의 대응관계 그 자체”와 같아서 참이라고 말해질 수도 또 의미를 가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표현은 자성(自性)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오해되는 엉뚱한 형이상학적 대상을 지칭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한편 우리가 “연기의 가르침은 진리 그 자체다”라고 말할 때와 같이 “진리 그 자체”라는 표현을 어떤 명제가 진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수사적으로 쓴다면 그 표현을 조심스럽게 허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표현을 ‘존재 또는 실재 그 자체’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공(空)의 통찰에 어긋난다. 나는 진리인 가르침은 존재하지만 진리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48호 / 2020년 8월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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