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 통도사 승가대학장 현진 스님

“만나는 인연마다 부처님 가르침 전하는 불자 되기를”

물 있는 곳이면 꽃 피우는 연처럼 우리도 어디서나 꽃 피우려면
탐진치 삼독에 마음 정원이 시들지 않도록 마음의 연 가꾸어야
사람이 가야할 길은 선한 마음…각자 법명이 곧 가야할 길 상징

현진 스님은 “요즘과 같은 혼란의 시절, 지혜가 무엇이고 자비가 무엇이며 보살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정진하는 불자가 되기를 당부했다. 맑은소리맑은나라 제공
현진 스님은 “요즘과 같은 혼란의 시절, 지혜가 무엇이고 자비가 무엇이며 보살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정진하는 불자가 되기를 당부했다. 맑은소리맑은나라 제공

옛날 어느 무더운 날, 어떤 분이 진정으로 시원한 바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이 사람은 “청량풍 부재선 부재수 부재공 지재심(淸凉風 不在扇 不在手 不在空 只在心)이라, 맑고 시원한 그 바람은 부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채를 움직이는 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허공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처럼 날씨가 무더운 날 마스크를 꽁꽁 쓰고도 더워하시지 않는 모습을 보면, 여러분은 마음이 참으로 고요하신 분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격적인 여름입니다. 이 시기가 되면 연밭을 찾아가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연밭에 가실 때 이왕이면 이번에 소개해 드릴 글을 새겨 연꽃과 연잎을 바라보면 새로운 느낌이 드리라 봅니다. 이것은 ‘연꽃 찬’이라는 노래입니다. 노래의 가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근대 지어진 시지만 내용과 흡사한 옛글도 있습니다.

‘자재요신입사주 부운한영벽파심 채련가중근진단 천애무처부지음(自在腰身立沙洲 浮雲閑映碧波心 采蓮歌中根塵斷 天涯無處不知音).’

자재는 자기 마음대로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유자재(自由自在)의 줄임말입니다. 요(腰)는 허리입니다. 입(立)은 서 있다는 뜻이고, 사주(沙洲)는 사바세계 남선부주(娑婆世界 南贍浮洲)를 줄여서 쓴 말입니다. ‘온몸이 허리 몸이 되어서 자유자재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흐느적흐느적하면서 사바세계 어딘가에 있는 듯하다.’ 이 말은 연꽃 자체를 우리 삶에 비유한 것입니다. 연꽃은 온몸이 허리입니다. 꽃줄기가 몸입니다. 연꽃은 물이 있기만 하면 어디서든 자랄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연꽃이 돋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인연에 따라 살아가는 장소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든 꽃을 피울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으로 뜰 부(浮), 구름 운(雲), 한가할 한(閑), 비칠 영(映)입니다. 벽파심(碧波心)은 잔잔하게, 어지럽지 않게 일렁이는 물결입니다. 부은한영벽파심은 연잎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 잔잔히 물결이 일렁이는 연못에 뜬 구름이 한가하게 비친 모습, 연잎이 그렇습니다. 공중에 뜬 뭉게구름이 해가 뜨면 못에 비치는 풍경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연잎의 모습이 마치 뭉게구름이 맑은 못 속에 비친 것 같이 생겼다는 표현입니다. 

채(采)는 나물을 캔다는 의미입니다. 연꽃 연(蓮)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화중연(火中蓮)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바세계에서는 자칫 마음을 방심했다가는 불꽃이 일어납니다. 평소에는 고요한 듯 있다가도 순간적으로 욕심을 내거나 진심을 내거나 어리석음을 내는 것은 불꽃과 같습니다. 우리는 탐진치라는 삼독의 불꽃이 타오르는 그곳에서 물들지 않는 연꽃을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연꽃의 의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화중연생(火中蓮生)을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불꽃이며, 그 속에서 타버리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일깨워가며 탐진치의 불꽃을 소멸하는 길, 그래서 꽃을 캔다는 의미는 곧 꽃을 가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마음속 정원에 시들지 않는 연꽃을 가꾸고 있습니다. 연꽃은 물들지 않아야 하는데 어느 날 탐심에 물들어버리고 진심에 물들어버리고 어리석음에 물들어버리면, 어리석음, 교만함 이런 것들이 나를 잡아 먹어버립니다. 그 순간 연꽃은 불길에 휩싸입니다. 꽃이 불길에 휩싸이면 시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휘둘리고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채련가(采蓮歌)는 연꽃 따는 노래라기보다는 연꽃 가꾸는 노래라는 의미입니다.

근진단(根塵斷)은 뿌리 근, 티끌 진, 끊을 단입니다. 주관적인 것을 근이라고 합니다. 안이비설신의를 육근이라고 합니다. 안이비설신의로 바라보는 바깥의 세상들은 객관적인 것, 색성향미촉법입니다. 이것을 ‘진’이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에도 나옵니다. 안이비설신의는 육근이고 색성향미촉법은 육진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이런 뜻입니다. 근은 내적인 것, 진은 외적인 것입니다. 복잡하게 실타래로 얽힌 것을 도끼로 딱 잘라서 끊는다는 의미로 근을 썼습니다. 근진단은 곧 ‘너다 나다 하는 이 분별이 끊어지나니’ 이런 의미입니다. 

천애무처부지음(天涯無處不知音)에서, 천애(天涯)는 하늘 천, 물가 애입니다. 저 하늘 끝이라는 의미입니다. 끝없는 하늘이니까 온 세상 정도 되겠습니다. 무처(無處)는 어느 곳에나, 이런 의미입니다. 그다음은 부(不) 띄우고 지음(知音)이라고 읽어야 합니다. 온 세상 어딘들 지음 아닌 이가 있겠는가. 글자 그대로 하면 ‘세상 어디엔들 나와 마음이 통하는 지음이 없겠는가’ 이렇습니다. 

지음이라고 하면 옛 중국의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이야기를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백아는 거문고를 무척 잘 탑니다. 종자기는 백아가 타는 악기 소리를 들으면 무엇을 마음속에 담아 연주하는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주는 벗이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망망대해 광활한 그 의미를 마음속에 담아서 연주하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렸습니다. 또 어느 날에는 “태산처럼 중국의 아주 높은 산의 웅장함, 너무 웅장하다 보니 두려움도 느껴지게 하는 그 웅장함을 저 음악 속에 담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주는 벗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종자기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부터 백아는 악기를 타지 않습니다. 자신이 악기를 타도 알아주는 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연주할 의미가 없다, 그래서 절현(絶絃)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우리 삶에 비추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그런 지음과 같은 사람을 한 사람씩 더 늘려서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단, 그 사람이 몇 명이라고 헤아리는 것은 분별심입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 그리고 그 주위에 있는 모두까지 전부 나의 마음속 무엇을 말해도 망설여지지 않는 그런 진정한 인연이고 벗이 되면 어떨까요. 지음은 곧 진정한 벗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상 어디인들 지음 없는 곳 있겠는가’ 이 정도로 하고 전체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온몸 허리 몸 되어 자재하게 움직이며 사바세계 서 있는 듯하고, 잔잔한 물결 이는 곳에 뜬구름 그림자가 한가하게 비춘 듯하구나. 연꽃 따는 노래 부르노라면 너와 나라는 분별 끊어지나니,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 어디엔들 지음 없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한 글귀를 더 소개하겠습니다. 요즘은 코로나19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기상이변으로 정말 혼란의 시절입니다. 이 시기에 내가 더 나아갈 길이 없다, 더 내려갈 곳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아마 무척 많을 겁니다. 이런 때일수록 정말 지혜가 무엇이고 자비가 무엇이며 보살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제 아무리 해도 더 나아갈 길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작정 좋은 말을 해줄 순 없겠지요. 그 사람을 위로해준 다음 다시 용기를 내라고 하면서 해줄 수 있는 말입니다. 

‘불파무전도 지공지불견(不怕無前途 只恐志不堅).’

불파무전도, 자신의 앞에 다시는 길이 없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왜 그런가 하면 네가 두려워하거나 염려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지공지불견(只恐志不堅), 다만 네가 두려워하고 염려해야 할 것은 너의 의지가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 공부하기 너무 힘들다고 하는 아이들에게도 해줄 수 있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결단 내려야 하는데 망설이는 것, 그것 역시 지금 네 의지가 굳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 아니냐, 그러니 너의 의지가 굳지 못한 것을 꾸짖고 염려해야지 세상에는 길이 없지 않다, 세상은 모든 것이 다 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밤송이를 실로 끼워서 공중에 매달아 놓고 보십시오. 그 밤송이가 가리키는 방향이 어딥니까? 방향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이 밤송이의 방향만큼 길이 많습니다. 소나무에 있는 솔잎도 그렇습니다. 온 방향이니까 전체를 다 가리키고 있습니다. 단지 의지를 갖고 나아가기만 하면 거기가 길입니다. 길은 정해져 있어서 길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경부고속도로가 있었습니까? 만들기 전에도 누군가 다녔습니다. 하늘에는 새들의 길이 있고 바다에는 물고기들의 길이 있고 숲속에는 산짐승들의 길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길은 어디입니까? 사람이 다니는 길은 선도(善道)라고 했습니다. 착할 선(善), 길 도(道)입니다. 사람의 길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선한 마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각자의 법명도 이 길을 뜻합니다. 법명은 곧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상징합니다. 이름일 뿐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입니다만 여름 동안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많이 웃으십시오.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문 앞에 서서 웃고 집에 들어가시고, 집을 나설 때도 웃으며 나서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닿으면 해제 후 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강의는 지난 7월22일 경주 황룡원에서 열린 ‘부산열린불교아카데미 부설 신라문예센터 - 아름다운 한시 산책’ 상반기 마지막회에서 현진 스님이 법문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49호 / 2020년 8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