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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조장터서 만들어지는 법기·범패

나무 없어 화장할 수 없고 습기 없어 썩지 않으니 조장으로 보리심 키웠다

해발 5000m 조장터 진동하는 피비린내 성스러움마저 삼켜버려
험상 굳은 분노존·노골적 성적 묘사는 적나라한 인간의 실체 표현
스님들이 들고 추던 해골은 모든 부차적인 것 사라진 순수의 표상

남초 호숫가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들. 

라싸공항에 내리는 순간 턱 하니 닥쳐오는 숨 막힘에 공포감이 밀려왔다. 천천히 숨을 쉬며 로비로 나오는데 사방에 흰 수건을 잔뜩 걸머진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였다. ‘뭐지 저 흰 수건?’ 어리둥절해 있는데 마중 나온 지인이 그 수건 하나를 목에 걸어 주었다. 티베트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거나 항상 가탁을 목에 걸어주며 축복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 따라 방문한 장터에서 처음 본 살풀이춤에 홀딱 빠졌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가탁의 길이, 재질, 촉감까지 우리네 살풀이춤 수건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던 초기에는 불교사원 가운데 가축사육장으로 전락한 곳도 있었다. 티베트를 방문할 당시 피폐해진 사찰의 보수와 재건을 위한 작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훼손된 도량을 둘러보는데 어디선가 노래와 함께 땅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예사롭지 않은 그 리듬과 가락을 따라가 보니 여러 남정네가 나무판을 두드리며 땅 다지기를 하고 있었다. ‘읏샤 읏샤’ 노래하며 발맞춰 손에 쥔 나무판을 때리는 것이 마치 박자를 맞추어 공연을 하는 듯 신명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신라 향가 중 사찰 불사를 하며 불렀던 ‘풍요’가 생각났다.

제뿡사원 불상 앞에 잔뜩 걸린 가탁. 존숭과 신망이 높을수록 흰 가탁이 많이 걸려있다.

체탕의 어느 곳에서는 마을을 다니며 노래하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알고 보니 한국의 지신밟기와 같은 것이었다. 오색 깃대를 꽂은 망태를 울러 매고 다니는 사람들의 마을에는 집집마다 오색 깃대가 꽂혀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국의 무속인 집과 같았다. 동네 사람들이 술을 따라 권하기에 마셔보니 한국의 막걸리와 비슷했다. 술잔을 받아든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술을 찍어서 세 번 뿌리는데 예전에 아버지께서 막걸리를 드실 때 ‘고시레~’ 하던 그 모습이었다. 방문한 집에서 권한 ‘짬바’는 미숫가루와 비슷했다. 야크 우유에 탄 것이라 약간 누린내가 나는 것 말고는 익숙한 맛이었다. 먹을거리며 생활방식, 일상용품, 색동무늬 옷, 어순이 같은 말씨까지 닮은 것은 불교와 더불어 몽골족, 우랄 알타이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서 양들을 몰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생활환경과 문화적 차이가 느껴졌다. 양떼를 모는 사람 중에는 몇 달 혹은 반년 이상을 초원에서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가장이 이토록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하니 한 여인이 형제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가 생겨났다. 이 얘기를 들은 우리 어머니는 “상놈의 나라”라고 했다. “지구촌 한 바퀴 돌아도 티베트 사람보다 더 착한 사람 없더라”고 하니 눈을 흘기셨다. “예전엔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했지만, 요즘엔 애 낳은 처녀가 드라마 주인공”이라고 해도 거부반응은 여전했다. 그해 겨울 라싸의 청년에게 일처다부제에 관해 물었더니 “요즘은 오지에나 있으려나”하며 피식 웃었다.

말씨며 풍속이 너무도 친근하여 마치 외가에 온 듯 정들어 가던 즈음 게치 교수가 “티베트에 대해 연구하려면 조장터를 봐야한다”고 말했다. “드라마를 보다가도 수술 장면에 채널을 돌리는 사람을 조장터에 가자고 하는 것은 고소공포증 환자에게 번지점프하러 가자는 것”이라며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러나 “외국인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데 즈쿵사원 주지스님이 친구라 특별히 허락을 얻었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 즈쿵사원은 라싸 시내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해발 5000m에 위치해 조장을 보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움직여야 했다. 차에서 내려 산언덕을 얼마나 걸었을까? 고산증으로 어지러움이 올 무렵 비릿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다. 고도가 높은 산마루에 비와 구름이 걸려있어 피비린내 섞인 빗물과 함께 시커먼 연기 같은 공포가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즈쿵사원 조장터.
출처=圖片取自維基百科
출처=圖片取自維基百科

마당에 들어서니 곳곳에 살이 뒤룩뒤룩 찐 시커먼 개들이 엎드려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기분 나쁜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주지스님을 만나기 위해 종무소에 들어서려는 순간 어떤 일행이 축 처진 포대 자루를 울러 메고 나왔다. “저 포대 안에 시체가 있어요”라고 함께 온 게치 교수의 딸 자이나가 귀띔해 주었다. 

“시체가? 자이나는 안 무서워?” 
“우리 아빠가 돌아가시면 내가 저렇게 할 건데요.”

자이나의 답변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른을 놀리는 듯 얄밉게 느껴졌다. 그런데 게치 교수는 한 술 더떴다. 

“즈쿵에서 조장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겁니다. 이곳이 제일 잘하는 곳이거든요.”

법당을 나와 조장터가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미 몇 구의 시체가 처리된 조장터에서 살점을 뜯으며 앉아 있는 독수리의 뒷모습이 사람보다 더 큼직했다. 조장터 철조망 입구에는 작은 기도처가 있고, 불단 앞에는 향불이 타고 있지만, 사방에 진동하는 피비린내가 향이며 불보살상의 성스러움을 다 삼켜버렸다. 군데군데 움푹 파인 곳에는 핏물이 고여 있고, 비에 젖은 룽다(오색 깃발)와 망자의 옷가지, 기도하고 남은 갖가지 제물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날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려 피비린내가 습기를 타고 몸속으로 젖어오는지라 치밀어 오는 구역질을 간신히 억눌렀다.  

방금 메고 올라간 그 포대도 이미 독수리의 밥이 되어 군데군데 살점이 흩어져 있었다. 하기는 한 구의 시신을 독수리들이 다 먹는 데 30분 정도가 소요되니 그 사이 이만큼 살과 뼈가 해체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떤 새들은 커다란 살점을 둘이서 마주 물고 잡아당기며 찢어먹는데, 유족들은 그것을 아주 태연히 지켜보았다. 어쩌다 땅에 떨어져 흥건히 고인 핏물에 적셔진 살점을 부리로 찧어 올리는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독수리가 먹고 남은 뼈는 절구통에 넣어 짬바 가루와 함께 찧어서 뿌렸다.

조장의 방식도 사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어떤 곳은 말뚝에 시체를 고정해두는 것이 전부지만, 즈쿵은 둥그런 돌무더기 위에 시신을 얹고 조장사가 칼질로 펼쳐 놓는 방식이라 독수리가 빨리 먹기에 유리하였다. 게치 교수는 “저 스님이 티베트에서 제일 잘하는 분”이라며 소개했다. 유족들은 새들이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으면 망자의 저승길이 편할 것으로 여겨 마음이 홀가분하지만, 남기거나 천천히 먹으면 저승길이 힘들 것으로 여겨 기도에 더욱 마음을 쏟는다고 했다. 그 광경을 한참 바라보다 법당으로 내려오니 스님들이 그날의 망자들을 위한 불공을 올리고 있었다.

즈쿵사원의 토굴.

하루에 3~5번 치르는 이곳 장례의식 범패의 율조를 음악적으로 보면 그간 들어왔던 저음의 발성과 다라니 송주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적나라하게 파헤쳐진 살갗과 뼈, 거기서 흘러나온 피비린내를 겪은 후의 범패는 지금까지 상상해 보지 못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중국의 응수불사에서 행하는 방염구(放焰口), 대만 수륙법회에서 들었던 염구의식과 화엄자모(華嚴字母)다라니, 한국의 시다림에서 하는 장엄염불이나 상여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울림이 살벌한 광경의 잔향과 함께 비장하게 와 닿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어찌 우리네 담담한 염불이 어울리겠는가.

조장터가 있는 산자락 곳곳에는 토굴이 있었는데, 올라갈 때는 못 보았던 그것이 내려오는 길에는 마치 숨어있던 주인공이 나타나듯 발길을 끌어당겼다. 토굴에는 작은 구멍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음식을 넣어주는 공간, 하나는 배설물을 내어놓는 공간이었다. 당시 그 곳에 수행하던 스님들 중에는 3개월 된 분이 가장 최근이었고, 어떤 스님은 11년째 수행 중이었다. 그 안에서는 면벽좌선을 비롯해 신구의(身口意) 합일의 내호마 등 다양한 밀교 수행법이 행해지고 있었다. 수행자들은 일 년에 한 번 햇볕을 쬐러 나오는데, 어느 순간부터 배설물을 내어놓지 않으면 토굴을 헐어 주검을 꺼내 조장하였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샴푸를 흐드러지게 풀어 머리를 헹구고 일어서는데 욕실 타일에 피가 흥건하였다. 샤워기로 물을 뿌리니 또다시 핏자국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나의 공포증이 불러온 환영이었다. 어떤 사람은 조장터에 다녀온 뒤 빙의현상을 겪기도 해 외국인에게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 조장터는 말과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도 핏자국과 피비린내 환영이 떠나질 않아 일주일 내도록 밥을 먹지 못하며 고된 후유증을 앓았지만 조장터의 경험은 어떤 값을 치르고도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야크 기름에 쩔은 법당의 험상 굳은 분노존과 노골적인 성적 묘사들은 적나라한 인간의 실체를 직시하게 하였다. 야채와 과일이 귀한 곳이니 스님들의 육식과 장기간의 유목생활의 일처다부제 또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땔감이 될 만한 나무가 자라지 않으니 화장을 할 수가 없고, 습기가 없어 땅에 묻어도 썩지 않으니 조장을 통해 보리심을 키웠다. 살과 뼈를 뜯어 발기는 조장터가 있으니 다리뼈 나팔 캉둥(rkang-dung)과 머리뼈 북 토드릉가(tod-rnga)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고, 스님들이 들고 추던 해골은 모든 부차적인 것이 다 사라진 순수의 표상임을 그 무렵부터 알아채기 시작하였다.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49호 / 2020년 8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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