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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52)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⑥ - (2) ‘중고’시기 왕권강화와 지배체제 정비-중

상대등‧내성‧집사부 잇따른 설치는 신라 국가권력의 완성 과정

법흥왕 율령 반포 후 귀족, 왕실, 관료 등 3권력 기관 차례로 정립
진평왕 때 지배체제 크게 정비했으나 여왕 즉위로 계승 못해
진덕여왕 때 집사부 설치 행정관서 정비…체제정비 빛나는 성과 

사적180호 경주 진평왕릉.
사적180호 경주 진평왕릉.

26대 진평왕대(579~632)는 대내적으로는 노리부(弩里夫)와 수을부(首乙夫)가 연이어 상대등으로 취임해 왕을 보좌함으로써 왕권과 귀족세력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가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혈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백제는 성왕의 피살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 국력을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분쟁은 있었지만, 격렬한 전투는 없었다. 이로 인해 비교적 정치적 안정을 이루게 된 신라는 대내적으로 지배체제 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대외적으로 불교를 중심으로 한 중국문화 수입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고대문화 건설과 삼국통일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진평왕대의 지배체제 정비과정은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기는 중앙 행정관서들이 정비되었고, 후반기는 왕궁과 왕실을 관리하기 위한 궁정기구가 정비되었다.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 중앙 행정관서 정비는 왕권강화와 관련해 주목을 받은 반면 왕실 관련 관서는 간과되어온 실정인데, 실제 왕권강화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왕실 관련 관서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아이러니한 일이다.

진평왕은 말년에 가까운 즉위 44년(622) 2월에 왕궁을 관리하는 기구로서 내성(內省)을 설치하고, 내성의 장관인 사신(私臣)으로 이찬 용수(龍樹, 일명 龍春)를 임명하여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등 3궁을 통합하여 관리케 하였다. 그런데 그에 앞서 진평왕 7년(585) 3궁에는 각각 사신을 두었는데, 대궁에는 대아찬 화문(和文), 양궁에는 아찬 수힐부(首肸夫), 사량궁에는 이찬 노지(弩知) 등이었다. 대궁은 반월성인 국왕의 궁전, 양궁은 6부의 하나인 양부(금석문에는 탁부)의 궁전, 사량궁은 사량부(금석문에는 사탁부)의 궁전을 가리키는데, 각각 사신을 따로 두어 관리케 하였던 것이다. 원래 이른바 마립간 시기(17대 내물마립간~22대 지증마립간)는 6부 공동지배체제였는데, 지증마립간대부터 6부 가운데 양부와 사량부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6부대표회의는 실제 2부 중심의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법흥왕 18년(531)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어 6부회의체를 초월하는 지위로 상승하면서 6부대표회의는 상대등이 설치되어 국왕을 대리하여 주관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왕궁・양궁・사량궁 3궁은 다른 부의 궁전과는 구별되어 특별히 관리되었고, 진평왕 7년에는 각각 사신의 직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3궁을 다시 통합하여 관리하는 기구로서 내성을 설치하여 용수를 장관인 사신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국왕의 권력이 강화된 반면, 양부와 사량부의 독자성은 약화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3궁의 장관과 뒤의 통합된 내성의 장관의 이름을 ‘사신’이라고 한 것은 상대등의 별칭인 상신(上臣)에 대응되는 것인데, 귀족회의(화백) 의장으로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의 반대편에서 국왕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사적 성격의 기구 책임자로서 내성의 사신이 위치하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결국 상대등의 설치는 국왕이 6부체제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지위로 상승한 사실을 의미한다면, 내성사신의 설치는 6부회의체제의 전통을 이어 받은 상대등을 대표로 하는 귀족세력에 대립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권력기반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만큼 왕권이 한 단계 높게 강화되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삼국사기’ 직관상 병부조에 의하면 병부령(兵部令)이 내성사신을 겸직할 수 있는 규정이 확인되는데, 내성과 병부 두 관서의 장관을 겸직한 인물은 명실공히 권력의 실세였다는 의미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용수가 3궁 통합의 관리기구인 내성의 사신으로 임명된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용수는 진지왕의 아들로서 진평왕과는 4촌 형제이자 장인 사위의 관계였다. 그는 일찍이 진지왕이 죽은 다음 왕위를 이은 진평왕에 의해 왕궁에서 성장하였으며, 뒷날 국왕의 측근으로서 집사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용수가 내성사신으로 임명되는 진평왕 44년에는 적어도 44세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진평왕 51년(629)에는 대장군의 직함으로 김서현-김유신 부자와 함께 고구려와의 낭비성(娘臂城) 전투에서 활약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용수는 선덕여왕 14년(645) 내성사신으로서 황룡사 9층탑의 조성공사를 주관하였는데, 왕궁 관리 기구인 내성은 원래 왕실의 불사를 주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혜공왕 7년(771) 봉덕사의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할 때에도 공사 책임자인 김양상(金良相)의 직함이 병부령겸전중령(兵部令兼殿中令)이었는데, 전중령은 전중성령(殿中省令)의 줄인 말로서 경덕왕 18년(759) 내성사신의 명칭을 한식(漢式)으로 변경한 것이다.

한편 진평왕은 내성을 설치하는 후반기에 일반 행정관서들의 정비도 계속하였다. 진평왕 45년(623) 정월 병부에 차관급인 대감(大監) 2인(3등관급인 弟監 2인은 진평왕 11년 설치)을 설치하여 상급관서의 정비를 계속하는 한편, 진평왕 46년(624) 정월 상사서(賞賜署)와 대도서(大道署)에 각각 대정(大正) 2인을 설치하여 중급관서의 정비도 함께 추진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시위부(侍衛府)이다. 왕궁의 수비와 국왕의 호위를 담당한 시위부에 대감(大監) 6인을 설치하여 3궁으로 구분된 3도(徒), 즉 3부대를 관장케 하였다. 이 시위대의 설치는 내성의 설치와 함께 실로 국왕 권력의 강화를 실제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적 기구로서 뒷날 용수의 아들인 김춘추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진덕여왕 이후 더욱 확대 정비되었다.

진평왕대 왕권안정에 수반하여 지배체제의 정비, 특히 일반 행정관서와 왕실 관리기구를 크게 정비하였는데, 문제는 그러한 정책이 후계 국왕에게 그대로 계승되지를 못하였다는 점이다.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서 왕위는 큰 딸인 덕만(德曼)이 계승하여 선덕여왕(632~647)이 되었다. 여왕의 즉위에 대해서 귀족들의 상당한 반대가 있었는데, 즉위 7개월 앞서 일어난 이찬 칠숙(柒宿)의 반란은 적극적인 반발의 표시였다. 선덕여왕의 즉위 당시 나이는 적어도 50대 이상의 노년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국정은 종실의 원로인 을제(乙祭)가 섭정을 맡았으며, 그 뒤를 이어 정치적 실권은 상대등 수품(水品)과 내성사신 용수가 분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왕에 대한 비판여론은 끊이지 않고 당태종까지 여왕의 퇴위를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고대제왕의 속성인 종교적 신성과 정치적 권력이라는 2중성 가운데 정치적 실권은 완전히 상실한 상태이고, 종교적 신성이라는 측면에서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條)에 보이는 여왕의 예지능력이나 불교의 진종설(眞宗說)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왕의 권위가 추락한 가운데 더욱 위기를 가중시킨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이 가열화된 것이었다. 마침 고구려는 강경한 연개소문이 집권하고, 백제는 호전적인 의자왕이 즉위하여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면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에 이르자 신라는 최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마침내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상대등 비담(毘曇)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여왕은 반란 중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덕여왕 재위 16년 동안은 ‘삼국사기’의 선덕왕조나 직관지 어디에도 행정관서의 설치 같은 지배체제의 정비 사실은 단 한 건도 기록되지 못하고, 분황사(芬皇寺)・영묘사(靈廟寺)의 창건이나 황룡사 9층탑의 조성 같은 불사에 관한 사실만을 전해줄 뿐이다.

선덕여왕이 즉위 16년(647)만에 죽고, 왕위는 4촌 자매인 승만(勝曼)이 계승하여 진덕여왕(647~654)이 되었다. 진덕여왕 때에도 앞선 선덕여왕대의 귀족연합의 정치운영 형태인 과두체제(寡頭體制)가 계속됨으로써 선왕과 같이 왕의 정치적 실권은 없었다. ‘삼국유사’ 진덕왕조에 보이는 6인 원로귀족의 우지암회의(于知巖會議) 기록은 비록 설화적인 형태이지만 과두체제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는 자료이다. 이 회의에서 알천공(閼川公)이 자리에 뛰어든 호랑이를 일거에 타살하는 완력을 자랑하여 수석에 앉았지만, 여러 사람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는 이야기는 알천이 상대등으로서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있었지만, 정치적 실권은 이미 김유신이 장악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알천은 선덕여왕 전반기에 수차 대장군으로 출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진덕여왕 때에는 귀족세력의 최고 원로로서 즉위년부터 말년까지 상대등의 직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권은 상실한 상태였다. 반면 금관가야 계통의 외래귀족 출신인 김유신은 진평왕 51년(626)의 낭비성전투의 참가를 시작으로 선덕여왕대의 후반기에는 알천을 뒤이어 대장군으로서 전공을 쌓았으며, 특히 선덕여왕 말년 54세 때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을 주도하면서 마침내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김유신과 처남 매부 관계인 김춘추가 45세로서 아버지인 용수의 권력기반을 이어받아 정계의 실세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특히 당과의 외교권을 장악하였다. 당시 정세가 3국 사이의 항쟁만이 아니라 당과 왜, 그리고 돌궐・거란・말갈 등까지 가세한 국제전쟁의 성격을 띤 상황에서는 군사력과 외교력이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군사력을 장악한 김유신과 그의 지원을 받으면서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진덕여왕대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진덕여왕대는 김유신의 눈부신 군사적 활약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막아내는 한편, 김춘추의 정치와 문화 양면의 뛰어난 외교적 활약으로 인하여 당과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당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정치와 문화 양면의 개혁을 주도하였다. 진덕여왕대는 비록 8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중국 복장제도의 채용, 진골의 아홀(牙笏) 사용, 당 연호의 사용, 정월 초하루의 신년 하례의식의 시작, 그리고 집사부(執事部)를 비롯한 행정관서의 정비 등 다방면에 걸친 정치와 문화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그 가운데도 특히 행정관서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체제 정비는 가장 빛나는 성과였다. 특히 진덕여왕 5년(651) 집사부의 설치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행정관서 정비는 신라의 전체 지배체제 정비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로 평가되며, 그 뒤 문무왕과 신문왕 2대의 정비작업은 사실상 진덕여왕대의 정비 작업을 계승하여 보완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신라의 왕권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에서 법흥왕 7년(520)의 율령의 반포 이후 3차례의 커다란 전기를 이룬 사건을 들면, 첫 번째는 법흥왕 18년(531)의 상대등 설치, 두 번째는 진평왕 44년(622)의 내성 설치, 세 번째는 진덕여왕 5년(651)의 집사부의 설치 등이었다. 당시 신라의 국가권력을 3개의 축으로 설정할 때 상대등은 귀족, 내성은 왕실, 집사부는 관료 등 3권력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러한 3권력이 혼합되어 작동한 것이 고대국가 권력의 운영방식이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49호 / 2020년 8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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