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제29칙 문협산경(問夾山境)
30. 제29칙 문협산경(問夾山境)
  • 김호귀 교수
  • 승인 2020.08.18 17:48
  • 호수 15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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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산의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자신의 경계 묻는 한 승려에게
지당한 것이라고 응수한 협산
스승 부름에 대답하는 것과 같아

한 승이 협산에게 물었다. “협산의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협산이 말했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으로 돌아가고, 새는 꽃을 물어다 이끼가 낀 바위에 쌓아둔다.”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는 약산의 제자인 도오원지(道吾圓智, 769~835)의 권유에 따라 오강(吳江)에서 뱃사공으로 살아가는 선자덕성(船子德誠)에게 참문하고 그 법을 이었다. 여기에서 협산에게 질문했던 승은 일찍이 조주에게 물었다.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뜨락에 있는 잣나무이다.’ ‘화상께서는 객관의 경계[境]를 가지고 주관의 사람[人]에게 이해시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승이 다시 물었다.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뜨락에 있는 잣나무라고 말했지 않았던가.’

승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조주는 상징적인 잣나무로 답변을 제시하였지만 승은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주의 답변은 참으로 노파친절한 자비심에서 일부러 승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자신의 신분과 체면을 모두 벗어던지고 승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답변을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뜨락에 있는 잣나무의 모습 그대로였다.

일찍이 조사서래의에 대하여 문답했던 그 승이 이제 경계에 상응한 이해를 짓지 않고 어떻게 말해야 계합되는가를 협산에게 묻고 있다. 그러나 정작 질문한 당사자가 경계에 얽매여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이처럼 객관을 의미하는 경계[境]와 주관을 의미하는 사람[人]의 문제는 선문답에서 항상 제시되는 유형이다. 경계를 벗어난 주관이 있을 수 없고 주관이 배제된 경계는 의미가 없다. 망상이 흥기하면 열반이 나타나고 번뇌가 일어나면 불도가 성취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오히려 망상이 흥기해야 비로소 열반이 터득되는 단서가 되고 번뇌가 발생해야 궁극에 불도가 성취되는 이유가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협산의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협산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제가 배우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서 한 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이었다. 이에 협산은 눈은 얼굴에 가로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로 붙어 있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지당한 가르침이라고 응수해준다. 그 비유가 곧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으로 돌아가는 격이고, 새는 꽃을 물어다 둥지를 만드는데 활용하기 위하여 바위에 쌓아둔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바위의 푸른 산속을 향해서 원숭이와 새의 행위를 이해하려고 상량해서는 안 된다. 새끼를 안고 돌아오고 또 꽃을 물어오는 바로 그 행위에서 곧장 멀어져버리고 만다. 결코 경계[是境]를 경계가 아니라고[不是境]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주객의 분별심으로 이끌어내지 말라는 것이다. 원숭이가 청산으로 돌아간 뒤[後]와 새가 바위 앞[前]에 꽃을 물어다 저장하는 것은 결코 전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원숭이의 행위와 새의 행위는 단절이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원숭이와 새의 자연스러운 행위는 질문한 승이 배우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라든가 그 열정에 대하여 협산이 응대해준 것이라든가 결국은 피장파장이다. 스승이 제자를 부르면, 제자가 예! 하고 답변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푸른 산과 푸른 바위는 일찍이 어느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은 천연스러운 모습으로 제자와 스승의 청정심을 상징한다. 반대로 원숭이와 새는 자연의 일상에 깃들어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삶을 의미한다. 이제 세간적인 번거로움을 벗어나 아무도 앞서간 적이 없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곧 협산이 내밀어 보여준 경계이다. 이런 점에서 협산선회는 한평생 뱃사공을 자처하여 오가는 사람들을 건네주는 보살행으로 승화시켰던 그의 스승 선자덕성(船子德誠)의 삶을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49호 / 2020년 8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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