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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중국 불교 융성의 밑거름이 되었던 사리 영험

황제들은 불사리 출현을 선정의 징표로 받아들여

인도 서북부 출신 강승회, 오나라 손권에게 사리 통해 전법
생생사리탑에 담긴 사리 1과, 1000년 뒤 1100과로 늘어나
사리는 방광하고 깨어지지 않고 불에 타지 않는 영험 보여

건초사 유리보탑 : 중국 장쑤성 난징. 인도에서 온 강승회가 모셔온 불사리가 보여준 영험에 감격해 오나라 왕 손권이 247년에 건립했다. 이후 장간사, 천희사로 불리다 명나라 때 대보은사로 바뀌었다. 유리보탑은 특히 화려해 세계의 중세시대 7대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린다. 사진은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온 요하네스 니호프가 그린 대보은사 9층 유리탑.

중국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500년 넘게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에 철학적 사유  방식과 논증이 크게 발달해 사상의 개화기를 맞았다. 또 도교가 성행하며 수행(修行) 경험도 쌓았다. 불교가 전래되자마자 선교(禪敎) 양면에서 상당한 수준에 오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불교라는 고차원의 학문 혹은 종교를 섭취할 만한 토양이 잘 갖춰져 있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논리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오랜 전법 과정 동안 개인이나 승단 입장에서 큰 난관에 맞닥뜨리거나 도저히 해결해 낼 것 같지 않은 어려움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그때마다 나타났던 불사리의 영험으로 고난을 헤쳐 나갈 의지와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영험을 보고 들은 경험은 사람들의 믿음을 불러왔고, 이런 믿음이 사리신앙으로 확대되면서 불교 전법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중국불교사를 읽다 보면 사리 영험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

가장 먼저 불사리 영험을 경험한 인물은 한(漢)나라 명제(明帝, 28~75)일 것 같다.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 등 인도의 고승들이 모셔온 불사리를 접하자 갑자기 불사리가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머리 위를 빙빙 돌며 햇빛을 가릴 정도로 밝은 오색광명을 발하였다. 명제는 감격해 불교를 널리 전하라는 부처님의 뜻이라고 여겼다. 

사리 영험담 중에서도 강승회(康僧會, ?~280)가 불사리를 통해 전법의 단초를 마련한 이야기는 특필된 정도로 유명하다. 강승회는 인도 서북부 강거국(康居國) 출신 스님으로 241년 불법을 전하러 중국에 왔다. 그는 인구가 가장 많은 강남(江南), 곧 양쯔강 이남을 전법지로 택해 그 중심인 오(吳)나라의 서울에 왔다. 아직 불교가 강남지역까지 널리 전해지지 않은데다가 그의 낯선 용모 탓에 의심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왕인 손권(孫權, 182~252)이 불러들였다. 손권이 “부처에게는 어떤 영험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그는 “부처님의 사리가 바로 그 영험의 자취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손권이 반신반의 하자 21일 안에 불사리를 얻어드리겠노라고 약속했다. 기약한 날 강승회가 병 하나를 바쳤다. 손권이 병을 뒤집어 보니 사리 한 알이 떨어지며 온 궁궐 안을 환하게 비출 정도로 밝은 빛을 뿜었다. 손권이 깜짝 놀라 “어떻게 이런 상서가 일어났소?” 하니 “불사리는 영험해서 세게 때려도 깨지지 않고 불에 넣어도 타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손권이 믿지 못해 망치로 사리를 내리치고 활활 타는 불 속에도 넣었다가 꺼내보게 했지만 조금도 훼손되지 않은 채 훌쩍 공중으로 솟아 커다란 연꽃 위에 올라앉았다. 그제야 손권은 불교를 믿게 되어 247년 건초사(建初寺)를 짓고, 지명도 ‘부처님이 계신 마을’이라는 뜻의 ‘불타리(佛陀里)’로 바꾸었다. 이로부터 강남지역의 불교는 탄탄하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생생사리탑 : 팔각칠층 전탑으로 가장자리 일부를 화려하게 유리로 장식했다. 특히 석양에 비추이는 모습이 장관이다. 당대 처음 지었을 시기에 불사리 1과를 봉안했는데 1739년 중건할 때 1100과가 나왔다고 한다. 

당나라 도선(道宣, 596~667)이 지은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는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질 때 적잖은 갈등도 있었으나, 불사리의 영험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이면의 역사가 읽힌다. 이야기에 나오는 방광, 불쇄(不碎, 깨어지지 않음), 불초(不焦, 불에 그을리지 않음) 등은 불사리가 보이는 영험들 중 하나이다. 이 외에도 공중선회, 오색방광, 공중변화, 수중방광 및 부침, 이동, 소리 냄 등 다양한 종류의 영험이 있다(김춘호, ‘중국과 일본의 사리영험담’, 2014).

영험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만 강조하면 전설이나 설화처럼 현실감이 떨어질 수 있다. 불사리의 영험을 역사적 사실과 연결해 해석하면 의미가 훨씬 커진다.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임천왕(臨川王) 유의경(劉義慶, 403~444)이 겪은 사리 출현의 영험담을 그런 예로 볼 수 있다. 

유의경은 후한 말~동진 시대 명사들의 일화를 모은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지은 문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송나라 왕족이기도 했다. 그는 431년 강릉(江陵, 현 양쯔강 북쪽) 지역이 기근으로 허덕이자 왕이 거듭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자원해 내려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헤아려주며 재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왔다(‘宋書’ ‘文帝記’). 그런데 역사서에 나오는 이 장면은 다음의 불사리 영험과 연결된다. 그가 강릉에 부임하자마자 문득 사리를 얻었다. 기뻐하며 건각 안에 두었는데, 그날 밤 어디서 왔는지 모를 100여명이 나타나 건물 주위를 돌며 향불을 살랐다. 자세히 보니 기이하게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마치 부처님처럼 생겼는데, 날이 밝자 사람들과 사리가 함께 사라졌다(‘집신주삼보감통록’). 불사리가 그 모습을 보인 이 영험은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그를 보살피러 내려갔던 유의경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황제나 제후들은 불사리의 출현을 자신이 행한 선정(善政)의 징표로 받아들여 큰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시[太原市]에 있는 봉성사(奉聖寺)의 사리생생탑(舍利生生塔)이 그런 예이다. 7세기에 처음 지어진 이 탑은 1751년 중건할 때 지궁(地宮)에서 사리함과 불사리가 든 금제 사리병이 발견되었다. 처음 봉안했을 당시 사리함에는 사리 1과를 봉안했다고 되어 있는데, 사리병 속에는 1100과나 들어 있었다. 천 년이 지나며 불사리가 늘어났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건륭황제는 부처님이 자신을 축원한 것이라 여기고 크게 기뻐하며 탑과 절을 대대적으로 중건토록 도왔다 한다.  

그런데 사리는 어떤 연유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인가? 그리고 이런 영험에 담겨 있는 뜻은 무엇일까? ‘열반경’(416년~423년 사이 담무참(曇無讖) 번역)에 “사리는 사람의 뜻에 따라 얻게 되거나 없어진다(舍利 隨意捨取)”라 한 것과, ‘석가의 육신은 법신(法身)이라 변하지 않으며 또 나타남이 아닌 데서 나타남이 있다’라며 불신(佛身)은 상주(常住)하다고 말한 대목을 대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49호 / 2020년 8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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