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깨달음을 주제로 젊은 바라문을 교화하다 ②
31. 깨달음을 주제로 젊은 바라문을 교화하다 ②
  • 이필원 교수
  • 승인 2020.08.24 17:17
  • 호수 155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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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안다는 사람 만나면 잘 관찰해야

잘못된 스승을 만나게 되면
자기 인생 송두리째 파괴돼
수행자 맹목적인 추종 말고
삼독 물들었는지 확인 필요 

세상에는 자신이 진리를 알고 있다, 혹은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과연 깨달았을까? 우리는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불교는 맹목을 싫어한다. 맹목이란 사전적 정의를 보면, ‘이성을 잃어 적절한 분별이나 판단을 못함’, 혹은 ‘주관이나 원칙이 없이 덮어놓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무비판적으로 어떤 것을 추종하는 자세를 말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보면, 건전한 비판이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여기저기 맹목적 추종이나 비난만이 난무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기에 맹목적 삶의 자세를 갖게 된다. 추종해서는 안될 사람을 추종하여,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부처님은 젊은 바라문 까빠띠까와 대화를 이어가면서, 어떤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잘못된 스승을 만나게 되면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파괴되기 때문에,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붓다] 바라드와자여, 이 세상에 한 비구 수행자가 어떤 마을 또는 동네 근처에 머무는데, 장자 또는 장자의 아들이 접근해서 세 가지 현상, 즉 탐욕에 기초한 현상, 성냄에 기초한 현상, 어리석음에 기초한 현상에 대해서 조사했습니다.

이 존자는 탐욕의 상태에 있으면서 탐욕의 상태에 사로잡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하며, 또한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을 가져올 길로 다른 사람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MN.II, pp.171~172)

부처님은 ‘어떻게 진리를 깨닫습니까?’라는 까빠티까의 질문에 위와 같이 대답하신다. 어떤 수행자가 있을 때, 그에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기반한 현상들이 있는지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있다면, 과연 그 사람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할지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탐욕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가 성냄에 사로잡혀 대중들을 향해 분풀이를 하고 분노를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어리석음에 빠져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를 비판해 보아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 혹은 진리를 알기 위해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오히려 불행과 탐진치의 구렁텅이로 가는 길이라면 이처럼 애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 사람의 신체적 행위와 언어적 행위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닌지.

[붓다] 그는 그를 조사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현상에서 벗어나 청정한 것을 알았으므로, 그에게 믿음이 확립되고, 믿음이 확립되면 존중하게 되고, 존중하면 섬기게 되고, 섬기면 청문하게 되고, 청문하면 가르침을 배우게 되고, 배우면 가르침에 대한 기억이 생겨나고, 기억이 생겨나면 가르침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게 되고, 의미를 고찰하면,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고,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면 의욕이 생겨나고, 의욕이 생겨나면 노력하게 되고, 노력하면 깊이 관찰하게 되고, 깊이 관찰하면 정근하게 되고, 정근하면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깨닫게 되며, 마침내 지혜로서 꿰뚫어 보게 됩니다. 바라드와자여, 이렇게 진리를 깨달아지고, 이렇게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궁극적인 진리를 성취하지는 못합니다.(MN.II, p.173)

부처님은 진리를 깨닫는데 올바른 스승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가르침에 대한 성찰과 끊임없는 노력이 지속되면 몸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는 궁극적인 진리를 성취하지 못한다. 부처님은 “(그렇게 깨닫게 된) 진리를 섬기고 닦아나가고 키워나가면 진리의 성취가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끊임없이 겸손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진리를 안다는 사람을 만나면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명심하여 그를 잘 관찰해야 속지 않게 될 것이다.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 nikaya@naver.com

 

[1550호 / 2020년 8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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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4 2020-09-02 12:02:33
물론
삼학 수행체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옃가지 수행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1적합한 수행환경과 때
2수행의 기본자세이며 수행坐인
올바른 가부좌의 성립
3독좌적 수행 행이다.

삼학수행은
계.정.혜.수행이 따로 분리하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의 좌정상태에서
삼학수행이 완성되는 것이다.

강조할 부분은
수행의 기본자세인
결/반/가부좌의 완성된 자세를 갖추는 일이다.

만약,
기본坐가 성립되지 못하였다면
결코,
Nirvana완성을 위한 수행은
불성립될 것이다.

구현설명은
다음 블러그:
미주현대불교 카페 <한줄수행기>란의 글
<불교수행의 실제>
(2019.8.1부터(42회)
반복 참구한다면
고질적 의문의 실마리는 풀릴것이다.

물론
이해의 몫은 각자의 몫이 되겠지만.

합장.

나그네3 2020-09-02 09:02:20
모든 敎理는
三學의 수행체계로 귀결된다.

戒學이랸,
戒律의 戒目을 지키는 修行단계가 아니다.

戒學의 수행단계는
意根에 生起하는 오온의 根原인
六境界를 六根의 門에들지 못하도록 警戒단속을
完成하기 위한 수행단계이며,

定學은
계학의 수행단계가 완성된
해탈Nirvana경지를 의미하며,
정학단계란
Nirvana경지체득 완성을 위한 Nirvana 삼매samadhi의 과정을 의미하며,
그 경지체득은 그 삼매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慧學이란
해탈경지 체득을 삼매를 통해 완성하고
삼매에서 깨어난 이 後,
完成者에게 드러나오는 後有證,
즉,智慧/ 통찰지/일체를 앎(깨달음(?)이라고 한다.

이렇듯이
불교의 완성은
해탈Nirvana경지체득의 완성이며,
이것이
불교의 完成이다.

나그네2 2020-09-01 09:21:23
한마디 더,

불교
깨달음이 主語가 아니라,
중생해탈이 목적이다.

깨달음(?)
그것은 해탈Nirvana경지체득 완성 後,
완성자에 드러나오는 後有證일 뿐이며
그것을
통찰지, 해탈지견이라고 한다.

해탈로 이끌 스승찾기란 쉽지않다.
다만
의지할 수있는 것은
오직 법등명하여
고타마의 해탈 수행체계인 三學의 修行法을 바로 알고 실천하는 것 뿐이다.

불교의 성립은
중생해탈이 그 주제이다.

그렇다면,
해탈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생의 조건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중생의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이 해탈Nirvana수행의 시작점이다.
그런데
그 조건을 바로 알고 수행하는 자는 없다.

해탈수행?
무엇을 어떻게 해탈하려는 것인가?

중생조건을 찾아 明知함이
우선일 것이다.

나그네 2020-08-31 13:51:02
진리란,
어느 대상에게 口傳으로 듣고 알아지는 것이 이니며,
이해했다고(?) 해도
현실에서 실현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 色卽是空"의 내용을 듣고 알았다 해도,
결코 현실에서 三毒이 해결될 수 없듯이 말이다.

진리란,
진정한 경계를 수행을 통하여 체득이 완성되었을때 비로소
완성자에게 드러나는 것이고,
삼독은 실현될 수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의 견해로-

진정한 진리는 전해듣고 이해 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다.
진리는 직접적 체득으로만 가능하다.

진리의 경계는 육경계의 전달방식으로는
그 경지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다만
오직 수행을 통해 육경계가 소멸된 Nirvana경계 체득이
삼매를 통해 완성되었을때
비로소 그 완성자에게 드러 나게 되는 것이다.

참고 바랍니다.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