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시계, 낡았지만 잘 손질된 모자, 금이 간 자기 주전자, 흑백의 가족사진. 남루한 살림의 풍경이 보인다. 가족사진을 깨끗한 천에 싸서 가방에 넣는 손 위에 다른 손이 겹친다. 여자는 가방을 싸고 있는 남자의 곁에 서 있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떠나야 한다. 도시는 음험한 괴물의 그림자로 가득 차 있고, 그 도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먼저 낯선 나라에 자리를 만들고 아내와 아이를 불러야 한다. 대사 한 마디 없이 연필선으로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은 그들 가족의 불안과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남자가 기차를 타고 떠난 뒤 여자와 아이는 괴물의 그림자 너울거리는 집으로 쓸쓸하게 돌아온다. 앞날은 불안하고 재회는 요원하다.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이 책은 살 길을 찾아 이주한 이들이 낯선 풍광과 낯선 문자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기나긴 항해 끝에 도착한 나라에는 기이한 생명체가 살고, 처음 본 탈것과 문자와 건물이 빼곡하다. 이해할 수 없는 단위의 화폐를 내고 처음 보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남자가 의지할 것이라곤 낯선 이의 친절뿐이다. 남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이들은 대부분 선배 이민자들이다. 남자에게 길을 알려주고, 차표 사는 법을 설명해주고, 시장을 보고 낯선 식재료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함께 식사하기를 청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탈출했는지 말해준다.
전체주의의 감옥에서 강제노역 끝에 탈출한 여자, 거대한 흡입기를 휘두르는 괴물에게서 도망쳐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한 부부, 다리를 잃고 전쟁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할아버지… 가난과 재난, 박해는 그들을 고국에서 몰아냈고, 그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 뿌리를 내려야 했다. 그들의 친절한 도움으로 남자는 차츰 적응하며 살 길을 모색하고, 몇 년 뒤 부인과 아이를 불러올 수 있게 된다. 아이는 새로운 나라에 금세 익숙해져 처음 이 땅에 온 이민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길을 알려준다. 아이의 아버지가 이 나라에 처음 왔을 때 선배 이민자들이 그랬듯이.
이 책의 첫 면지와 마지막 면지에는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가진 이들의 증명사진을 그린 그림이 빼곡하게 실려 있다. 저자는 뉴욕 시에 있는 엘리스 아일랜드 뮤지엄에서 이민자들의 사진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들의 얼굴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실감하게 한다. 얼굴은 다양하지만, 표정은 한결같다. 두려움과 경계가 짙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한 겹 벗겨내고 나면 얼마나 따뜻한 얼굴이 숨어있을지 우리는 안다. 저자는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을 돕는 사람에 대해서, 부처의 얼굴에 대해서.
저자인 숀 탠은 이민자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1960년 말레이시아에서 서호주로 이주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일랜드, 영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 3세대이다. 그림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환상적으로 펼쳐지지만, 이민자의 ‘막막함’은 극히 사실적으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저자는 이민자의 심리를 잘 묘사하기 위해 많은 이주자들의 수기를 참조했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한 노트이자 해설서인 또 다른 책 ‘이름 없는 나라에서 온 스케치’에서 그 과정을 꼼꼼하게 밝힌다. 설명을 들으며 보면 이 책의 행간에 얼마나 많은 것이 숨어있는지 알 수 있다.
세계적으로 약 1억 9100만 명이, 다시 말해 지구에 사는 35명의 사람 중 한 명이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의 적이 되어 제 살던 땅에서 몰아내고, 속수무책 쫓겨난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막막해진다. 하지만 결국 그들을 돕는 것도 인간이다. 동병상련의 인간이다. 제 처지도 넉넉하지 않으면서 선뜻 손을 내미는, 다른 이의 막막함을 깊이 이해하고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아는, 할 수 있는 만큼 한발자국씩 함께 가자고 말하는 이도 인간이다. 낯선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기어코 친근한 표정을 찾아낸다. 우리가 결국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서로 도우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 말없는 책은 힘주어 말해준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50호 / 2020년 8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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