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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장욱진의 ‘팔상도’ : 이야기만 남긴 부처님의 생애

기자명 주수완

일체의 것 배제하고 본질만 남겨 선(禪) 명료히 전달

만공 스님 가르침 받고 출가하려다 그림 소질 발견
추상적이면서도 강렬한 선 이미지 드러낸 팔상도와
아내 그린 ‘진진묘’서는 자신만의 선 재해석해 표현

‘진진묘’, 33.0×24.0cm, 캔버스에 유채, 1970년, 개인소장.
‘팔상도’, 캔버스에 유채, 1976년, 35×24.5cm, 개인소장.

장욱진(張旭鎭, 1918~1990) 화백의 그림은 마치 동화의 삽화 같은 느낌을 준다. 작품마다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천진함이 묻어나면서도, 그 안에서 들려오는 깊이있는 이야기가 느껴지는 것이 매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화가이지만, 전통회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문인화풍을 구사한 서양화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비록 그 스스로는 말하자면 직업화가에 속하는 전문 화가이지 문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인화’가 사의(寫意), 즉 문학의 정취나 사상, 혹은 정신세계의 핵심을 시각적으로 압축하여 표현한 그림이라고 했을 때, 장욱진은 그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가일지도 모르겠다. 사의가 ‘뜻’의 요체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장욱진은 이야기의 요체를 드러냈다는 차이점이 있다고나 할까.

나아가 사실상 우리나라 역사의 어두운 시기로 인식되는 시대를 살아왔음에도 그의 그림에서는 그래도 삶이라는 것을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느껴져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렇다고 그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데다 그림에 있어서만큼은 승승장구 인정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세상의 고통을 몰랐던 것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가 지금의 경복고등학교에 재학하던 때에는 역사 과목 선생에게 대들었다가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니 나름 시류에 둔감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는 불교와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우선 그의 부친은 장욱진의 고향인 연기군에서 가까운 예산 수덕사의 중요한 시주자였고, 또한 당시 주석하던 만공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본인 자신도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이후 성홍열을 앓게 되어 수덕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만공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만공 스님은 이때 은근히 그를 출가시키고 싶어 했지만, 그의 그림 소질을 보고 ‘예술의 길과 불교의 길이 다르지 않다’며 그를 속세로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그이기에 어려서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특히 만공 스님이 출가를 시키려고 하셨다는 것을 보면 그의 평소 생각이 불교에 가까웠음을 알아채셨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의 요체를 드러내는 그의 화풍은 사물이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조의 능력이 필요했을 것 같은데, 그런 그의 생각을 보시고 만공 스님께서 불교와 예술가의 시각이 다르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 아닐까.

그런 장욱진이 남긴 불화, 그 중에서도 불교의 이야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팔상도’는 그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형태에 있어서 파격이라는 측면은 김명국의 ‘달마도’가 빠르고 생략된 필치로 추상적이면서도 강렬한 선(禪)의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낸 것에 반해 장욱진의 ‘팔상도’는 그 압축을 더 쉽게 풀어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진진묘’와 같은 작품은 ‘달마도’와 같은 압축적인 선종화의 범주에서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암시적이기는 하다. 이 작품은 자신의 아내를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진진묘는 아내의 법명이었는데,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또한 역사학자 이병도의 딸이었는데, 장욱진은 장인인 이병도로부터는 그리 인정받는 화가가 아니었다고 한다), 불교미술의 입장에서 보면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부처님처럼 보인다. 깡마른 몸매이지만 그렇다고 고행을 하거나 몸이 야윈 상태라는 불안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열반에 이르기 위해 많은 것을 덜어낸, 그래서 홀가분한 상태의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드러난 종아리보다 오히려 옷 아래의 튼튼한 허벅지가 먼저 다가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무외·여원인의 재해석이랄까, 그 자세가 매우 당당하고 자신감이 차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의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 안에서 장욱진만의 선(禪)이 엿보인다.

그에 반해 ‘팔상도’는 이야기를 더 넓게 펼쳐놓았다. 만약 작품 속 다양한 부처님 이야기들을 따로따로 떼어놓았다면, 이게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하나하나는 난해하다. 그러나 그런 난해함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비로소 뜻이 풀리고 연결이 된다.

예를 들어 화면 상단 오른쪽 사문유관 장면을 보자. 단지 네 채의 집만 댕그러니 그려두었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며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마치 기호처럼 보이지만, 실은 말을 타고 출가하는 싯다르타 태자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어우러져 이것이 사문유관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유성출가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체의 것을 배제하고 오로지 이야기의 본질만 남긴 결과이다. 이야기가 끊어지면 줄거리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이 그림의 구성요소들도 떨어져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만큼 다른 장면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 것이다.

하단 오른쪽의 열반 장면도 마찬가지다. 네모난 상자에 그려진 발바닥과 주변의 가면같은 얼굴들로만 표현해낸 열반의 순간과 그 주변에서 다비할 때 쏟아지는 사리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시점을 하나로 통합하여 함축적이면서도 명료하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그 옆에는 원래의 팔상도에는 포함되지 않는 부처님의 전생이야기인 살타태자의 ‘사신사호’ 장면이 삽입되어 있는데, 배고픈 사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이로 주었다는 이야기다. 왜 이 장면을 넣었을까? 그것도 열반이라는 죽음의 장면 옆에 또다른 전생의 죽음을 넣어 대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많은 전생의 죽음을 이 장면으로 압축하고, 이어 마지막 열반장면을 대비시켜 이것이 석가모니의 마지막 죽음임을 보다 효과적으로 각인시키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시대는 이모티콘의 시대이고, 만화의 시대이며, 또한 스토리텔링의 시대이기도 하다. 어쩌면 장욱진은 현대사회에 있어서 불화가 지녀야할 요소들을 함축적으로 이 그림 안에 담아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의 내용 뿐 아니라 형식까지 불교였던 ‘달마도’처럼, 이야기의 본질만 남긴 장욱진의 그림 스타일도 만공 스님의 말처럼 불교와 다르지 않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50호 / 2020년 8월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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