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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룸비니서 만나는 불음(佛音)

불교음악은 범어 원음 선율화…한국은 한문 편중돼 아름다움 잃어

히말라야 신성함 서린 동산엔 각 나라 불교 특징 담긴 사원들 가득
궁라·빤짜다나 등 불교축제 통한 보시로 룸비니 네팔사원도 건립 중
우리네 진언·다라니 달리 상좌부 스님들 외는 범어는 그 자체가 음악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히말라야 피쉬테일.

인도 북부 국경 소나울리에서 통과 도장을 받고 지프를 탔지만 룸비니 게이트를 지나도 인도에서 벗어난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파란 하늘과 푸른 숲이 보이기 시작하자 이름도 예쁜 룸비니가 지척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구 최고의 명산 히말라야 산자락 평원의 룸비니에는 마음만 먹으면 안나푸르나 계곡을 산책할 수 있고, 구름이 바람에 날리는 순간에는 그 유명한 피쉬테일이 눈앞에 나타나며, 반딧불이 반짝이는 포카라 호수가 지척에 있으니 어쩌면 마야부인 태속 아기가 이곳의 아름다움을 보러 그만 어머니 뱃속을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신묘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했다. 과장이 심하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지만 산스크리트와 힌두 문학을 배우면서 그런 생각마저 사라졌다. 일곱 걸음이라는 뜻의 ‘사쁘따빠디’는 인도의 결혼식에서 신랑·신부가 하는 세리머니 중 하나이기에 다의적인 메타포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상 최고의 낙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다운 룸비니지만 중세 무렵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된 이후 잊힌 곳이었다. 1896년 고고학자 퓨라 박사가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를 찾아내며 룸비니임을 알게 됐지만 그러고도 반세기 이상 황폐한 채 있었다. 1967년 이곳을 방문했던 우탄트 유엔사무총장이 룸비니의 재건을 호소하면서 복원이 시작돼 마야데비사원, 아쇼카석주와 더불어 세계 여러 나라의 사원이 들어섰다. 평화의 불꽃 동쪽에는 미얀마, 인도, 태국 등 남방불교 사원, 서쪽에는 한국, 중국, 티베트 등 북방불교 사원이 있다. 히말라야 등반로 앞이다 보니 수많은 여행객이 몰려오는데, 그들 사이에 독일사원과 한국사원의 인기가 높았다. 
 

룸비니 게이트.

독일사원에 가보니 넓은 연못에 티베트에 온 듯한 사원 건물과 주변 경관이 너무도 아름다워, 왜 여행객들이 “저머니 템플, 저머니 템플”하는지 알만했다. 그런데 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로마 교회 같은 천장벽화에 티베트식 만다라가 그려져 있어 유럽의 문화적 DNA를 지닌 사람들이 불교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눈으로 보는 듯했다. 친절하기로 소문난 코리안템플 대성석가사로 오니 이 또한 만만찮다. 지붕 모습이며 법당에 걸린 소종까지 온전한 한국이 아니어서 타지에서 한국을 재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했다. 마찬가지로 인도의 불교가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으로 건너와 어떠한 모습으로 변형됐는지를 역으로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다. 필자가 룸비니를 갔던 무렵 대성석가사 대웅전의 단청과 내부 마무리가 되지 않아 삭막한 분위기였지만 요즈음은 전반적으로 마무리를 마친 상태다. 

룸비니의 여러 나라 사원 중 한국의 절터가 가장 명당이라며 열심히 설명해 주시는 스님의 설명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다 지나는 사람들을 만났다. “어디서 왔느냐? 안나푸르나는 언제 가느냐?”고 묻는 것이 입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안나푸르나는 전문 등산가들이 완전 무장해야 갈 수 있는 곳 아니냐”는 물음에 그들은 “우리는 슬리퍼 신고 나물 캐러 간다”고 동네 마실 가 듯 답했다. 해서 스틱과 운동화를 빌려 신고 왕복 일주일을 걸어야 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에 도전했다. 하산하는 길 오른발 엄지발가락이 부어오르며 불덩이가 돼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새 발톱이 날 것이니 걱정말라”며 덤덤히 말했다. 그야말로 현지인과 외지인의 갭을 뼈저리게 느꼈다.  

히말라야의 신성한 기운이 서린 이 동산에 온 세계의 사원이 다 있는데 왜 네팔 사원은 없는 것일까? 궁금해 알아보니, 영국 식민지를 벗어난 후 인도와 분리되면서 급진 좌파인 네팔 공산당 NCP와 왕정이 거세게 충돌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불교인구는 소수라 사원을 건립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 룸비니 네팔 사원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펼쳐져 건립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룸비니에서 마주하게 될 네팔 사원에 대한 기대가 크다.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

룸비니 네팔 사원 건립에는 불교축제가 큰 힘이 됐다. 궁라(Gunla) 축제에서는 매년 승가의 은혜를 기리며, 자비행을 실천하는 빤짜다나 축제에서 사원 건립을 위한 물건과 금전을 보시 받은 것이 룸비니의 네팔사원 건립을 위한 종잣돈이 됐다. 이후 카트만두와 라릿푸르에서 열린 다나 축제에서도 많은 기부금이 모여졌다. 이러한 결과로 룸비니의 부지를 사들이고, 건설 자재를 갖추어 가던 중 네팔 시민과 네와르 공동체의 후원이 더해졌으니 조만간 네팔식 사원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룸비니 네팔 불교사원 건립의 동력을 제공한 축제들은 네팔 불교음악뿐 아니라 민간 풍류도 흐드러진다. 옆으로 누인 북통 양쪽에 가죽을 붙인 마달과 좀 더 몸집이 큰 디메이를 울러 메고 두드리며 춤추는 사람들은 예전 우리네 시골 마을의 모습과도 닮았다. 마달은 한국의 장구와 같이 양면 북이기는 하지만 허리가 볼록하며, 북면에는 인도의 따블라와 같이 쇳가루를 으깨어 붙인 조율점이 있어 울림이 부드럽다. 북과 함께 수많은 악대가 피리를 부는데 검은 관대를 옆으로 부는 것은 반수리, 세로로 부는 것은 쉐나이다. 불교의례에서는 티베트 스님들이 부는 소라 나팔 락샹마에 둥카르, 걀링이 있고, 타악기로 롤모(심벌즈)나 틱샹을 두드리기도 한다. 

네팔의 노래는 유쾌하고 화창하며 목청을 굴리는 요성이나 장식음이 많고, 리듬의 박절감이 흥겨워서 구경꾼들도 어깨를 들썩이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놀 때는 디메이 북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때 여자들은 알록달록한 의상을 입고, 남자들은 흰 수건을 두르고 흰 바지저고리를 입는다. 골짜기가 깊은 만큼 지역적 차이가 크지만 풀쩍풀쩍 뛰며 흥을 내는 모습이 남 같지가 않은 데에는 네팔과 한국이 지닌 산악지역 사람들의 친연성이 있다. 미디어가 발달한 요즈음은 K팝의 인기가 대단해 안나푸르나 등반길 롯지에서도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었다. 젊은이들은 전기 기타와 함께 전통악기도 함께 연주하지만 록을 연상시키는 강한 비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젊은이들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탈을 쓰고 퓨전 악기를 연주하는 팀이 있었는데, 티베트 참무에서 보았던 호법 다키니의 탈과 힌두 신들의 탈이 섞여 있어 이 나라 종교문화가 그대로 음악으로 반영되는 모양새였다.
 

룸비니 독일사원의 천장 만다라.

인류의 모든 음악은 언어에서 시작되듯이 불교음악의 원천은 부처님의 음성과 말씀에서 시작된다. ‘보요경’에는 “석가동자가 7세 때 일만의 동자와 분별서자(分別書字)를 노래했다”는 내용과 함께 자모(子母, 알파벳)를 적고 있다. 축법호가 번역한 또 다른 경전 ‘광찬반야바라밀경’에는 범어 자모 하나하나에 수행 덕목을 부여하고, 연기성공(緣起性空)에 의해 첫 자인 ‘아’자로 귀결되는 범어자모를 다라니화 했다. 이후 무라차의 ‘방광반야바라밀경’, 구마라집의 ‘대품반야경’에 이어 불공에 의해 ‘화엄경’에 편입된 자모는 모두 42자이지만 ‘대일경’과 ‘열반경’에 이르러 51자로 늘었다. 이는 부처님 말씀의 기본 자모인 “아라파차…”에서 미묘한 발음 4가지를 세분해 더한 것이다. 자모음은 해탈의 종자(種子)이므로 오늘날 중국과 대만에서는 지옥 아귀를 위한 유가염구에서 불리기도 한다. 수륙재에서는 화엄자모와 찬게(讚偈)가 불리는데, 본 순례기에서는 건너뛰었다. 관심이 있다면 필자의 졸저 ‘문명과 음악’에서 확인할 수 있고, 윤소희카페에서 들을 수 있다.  

부처님 열반 후 유부는 산스크리트, 상좌부는 팔리어와 유사한 파이샤치(Paiśācī), 대중부는 마하라슈트리(Māhārāshtrī), 정량부는 샤우라세니를 사용했다. 기원전 2~1세기 무렵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하는 교단이 까슈미르(Kásmīra)와 간다라(Gandhara) 지방에 정착하므로써 이곳에 간다라어 ‘담마파다(法句經)’가 남아 있고, 구마라집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은 그의 고향인 중앙아시아 쿠차(Kucha)의 언어로 쓰여졌다. 기원 전후 승가에는 혼성 산스크리트(Buddhist Hybrid Sanskrit)를 사용했는데 이는 ‘묘법연화경’에 남아있으며, 오늘날 중국·한국·일본에서 경전어로 통용되는 실담범자(Siddhammātṛkā-type)는 굽타형의 문자에서 파생된 것이다.
 

마을 행사에서 흥을 내고 있는 네팔 사람들.

부처님의 설법어였던 마가다어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구전으로 암송해오다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어로 음사한 것이 최초의 경전이다. 현재 싱할리즈, 미얀마, 캄마, 태국, 데바나가리, 몽골, 그리고 로마자 7가지 버전이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서울말이나 경상도말이나 알아들을 수 있듯 산스크리트, 팔리, 실담, 데바나가리는 같은 인도어이므로 이해할 수 있다. 사방으로 파견됐던 군인들의 언어가 오늘날 힌디어로 쓰이며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되고 있고, 네팔 불교음악의 가사도 데바나가리로 표시돼 있어 범어를 안다면 읽을 수 있다. 

불교문화권 여러 나라 음악을 들어보면 범어의 원음을 선율화한 것이 많다. 그에 비해서 한국에서는 중국의 한문 게송을 늘여 짓는 것에 편중돼 부처님의 말씀어인 범어범패의 율적 아름다움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진언과 다라니는 달달 외는 것이 대부분인 우리와 달리 미얀마나 스리랑카 스님들이 외는 경전 율조는 범어 그 자체가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려한 선율이 많다.

윤소희 음악인류학 박사·위덕대 연구교수 ysh3586@hanmail.net

 

[1551호 / 2020년 9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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