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제31칙 무은신처(無隱身處)
32. 제31칙 무은신처(無隱身處)
  • 김호귀 교수
  • 승인 2020.08.31 15:32
  • 호수 15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행  않고 깨침 얻은 방법 무엇인가?

떠 보려 한 질문에 정색한 운거
이미 깨쳐 있단 전제 하에 대답
조사선풍 사상 기반, 본래성불

한 승이 운거에게 물었다. “전혀 공부하지 않고서 어떻게 입신한다는 것입니까.” 운거가 말했다. “입신할 까닭이 없다.” “그러면 불사란 어떤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운거가 말했다. “불사는 자비심을 일으키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본 문답을 이해하는 열쇠는 승의 상식적인 질문에 대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 835~902)의 답변이 대단히 역설적으로 시설되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수행을 하지 않고 깨침을 터득하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상식을 벗어나 있어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운거는 질문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친절하게 답변을 해준다. 그 답변이란 바로 깨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답변에 대하여 승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질문한 승도 수행이 없이는 깨침이 없다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짐짓 운거의 깜냥을 떠보고자 할 심산으로 질문한 것인데 운거는 정색을 하고 답변해준 것이다. 운거의 답변에 선종사상적인 배경의 이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운거가 말한 ‘깨칠 필요가 없다’는 답변은 말 그대로 깨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이미 깨쳐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달마로부터 연원된 조사선풍의 사상적인 기반은 바로 이와 같은 본래성불(本來成佛)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체중생이 본래성불이건만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분별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운거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새롭게 깨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답변해준 것이지 자각할 필요까지 없다고 말해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질문한 승은 아직 이해가 부족하다. 그리하여 점입가경으로 다시 질문한다. 깨칠 필요가 없다면 불사는 어찌해야 성취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불사는 발심과 수행과 증득과 전법교화의 일체를 포함하고 있는 말로서 불법생활에 대한 근원적인 면모에 대하여 의문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운거는 불사야말로 애써 자비심을 일으켜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초월하여 나와 그대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정진이고 불사라는 것이다. 불사는 본래부터 성취되어 있어서 굳이 애써 조작하며 조탁(彫琢)할 필요가 없는 줄을 알아차려야 한다고 답변해준다. 

불사마저도 애써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승은 더욱더 당황하였다. 승은 아직도 수행과 깨침에 대한 상식의 범주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때문에 운거의 그와 같은 역설적인 답변에 의기투합하지 못하였다. 운거가 그렇게 답변해준 것은 승을 놀려주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수행은 일반적으로 간주하고 있듯이 지난한 정진을 통하여 그 궁극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음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조사선풍에서 지향하고 있는 수행은 그와 같은 수행[熏修․作修]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경우도 있음을 운거는 자신의 답변을 통해서 이해시켜주고자 한 것이다. 

이미 깨침을 성취하고 난 이후에도 열반에 이르기까지 평생토록 좌선수행으로 일관했던 부처님의 수행은 바로 깨침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수행[妙修․本修]의 모습이었다. 후자의 경우 그 수행은 조작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본래부터 애써 수행을 조작할 필요가 없고 애써 불사를 지을 필요가 없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운거는 평생 수행과 깨침을 드러내지도 않고 당시에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노출시켜주었다. 어떤 거사가 한 승에게 물었다. 저희 집에는 솥이 하나 있는데 평소에 떡을 찌면 세 사람이 먹기에도 부족하지만 그것을 천 사람이 먹으면 남습니다. 스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 승이 답변하지 못하자, 곁에 있던 운거가 말했다. 다투면 세 사람이 먹어도 부족하지만 양보하면 천 사람이 먹어도 남는 법이다. 불법이 아무리 넘친다손 치더라도 실천해야 의미가 있음을 드러내준 것이다. 여기에서 운거는 정작 수행과 깨침이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깨치느냐 하는 측면보다 그것을 어떻게 유지하고 실천하느냐 하는 용심이 필요함을 제시해주고 있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51호 / 2020년 9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