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3.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53)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⑦ - (2) ‘중고’시기 왕권강화와 지배체제 정비-하

진덕여왕의 정치개혁은 행정관서 체계마련으로 지배체제 완성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행정기구를 총괄하는 집사부 설치
외교담당 영객부 격상…이방부 설치로 율령국가 토대마련
상대등‧집사부중시‧내성사신 등 국가운영 권력 3각축 완성

삼국사기 중종 임신년 목판본 권38 직관지 부분.출처=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 중종 임신년 목판본 권38 직관지 부분.출처=국사편찬위원회

28대 진덕여왕대(647〜654)는 선덕여왕 말년 일어난 비담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한 혈투를 계속하였고, 친당정책의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는 당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 정치와 문화의 개혁을 추진하여 다음에 등장하는 강력한 중대왕권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진덕여왕대 김춘추가 주도한 정치와 문화의 개혁내용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것은 중앙 행정관서의 정비와 새로운 운영원리의 모색이었는데, 이것은 왕권강화의 차원을 넘어서 국가체제를 전면적으로 정비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신라역사를 구분할 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모두 ‘중고’와 ‘중대’의 구분 시점을 28대 진덕여왕부터 29대 태종무열왕의 왕위 교체기(654)로 설정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진덕여왕의 즉위 시점(647)부터 ‘중대’는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5년(651) 2월조에는, “품주(稟主)를 고쳐서 집사부(執事部)로 만들고 파진찬 죽지(竹旨)를 집사중시(執事中侍)로 삼아 기밀사무(機密事務)를 관장케 하였다”라고 하였고, 다음해 정월조에서는, “파진찬 천효(天曉)를 좌이방부령(左理方府令)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집사부와 좌이방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의 직관지에서는 진덕여왕 5년에 집사부와 좌이방부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행정관서들이 새로 설치되거나 정비되고 있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어 이때의 행정관서 정비는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사실상 이때의 정비를 통해서 전반적인 행정관서 체계는 일단 마련이 된 것이며, 이후 중대에 들어가서의 정비는 진덕여왕대의 정비내용을 보완하는 데 불과한 것이었다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덕여왕 5년의 행정관서 정비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집사부 설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신라의 행정관서 정비는 법흥왕 3년(516, 신라본기에서는 4년) 병부의 설치로부터 시작되어 진흥왕대의 사정부・품주, 진평왕대의 위화부・조부・승부・예부・영객부 등의 여러 관서들이 설치되어 왔었다. 그런데 이들 관서들은 필요에 따라 특정의 행정업무를 위해 설치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행정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진덕여왕대에 설치된 집사부는 분화된 행정의 일부를 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사부는 국왕과 행정을 분장하는 여타 관서와의 중간에서, 위로는 국왕의 명령을 받들고 아래로는 여러 관서들을 통제하는 지위를 차지한 것이었다. 따라서 집사부는 행정체계상으로 볼 때에 신라최고의 행정관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집사부 장관인 중시는 왕명을 받아 집행하는 최고 행정책임자였다는 점에서 옛날 6부대표자회 전통을 이은 귀족회의 의장으로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과는 그 성격에서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며, 왕실의 가신이나 집사로서 출발하여 왕궁과 왕실의 관리를 맡고 있던 내성사신과도 그 성격에서 확실히 구별되는 것이다.

집사부는 진덕여왕 5년에 정비되었지만, 처음으로 신설된 것은 아니었다. 품주(稟主)에서 개편된 것이었다는 점은 앞에 인용한 ‘삼국사기’ 진덕왕5년조의 내용 그대로이다. 원래 6부체제에서는 각각의 부에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이 분화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군사・사정・재정 등의 분야를 담당하는 직책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중앙집권적 고대국가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특히 왕권이 크게 강화된 법흥왕 3년(516)에 병부, 진흥왕 5년(544)에 사정부 역할의 관직(뒷날의 차관직인 卿), 26년(565)에 재정 담당 관서로 품주의 관직(典大等) 등이 중앙행정관서로 설치되었다. 그 뒤 진평왕대에 이르러 특히 재정 분야의 임무가 커지면서 진평왕 6년(584)에 품주에서 공물과 부역 분야를 분리하여 새로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진덕여왕 5년에 이르러 다시 재무 분야를 떼어내서 창부(倉部)를 설치하고, 아울러 앞서 분리되었던 조부도 강화하여 장관인 영(令) 2인과 실무직인 대사(大舍) 2인을 증설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품주의 고유한 전통을 계승하여 행정실무 전반을 관장하는 최고 관서로서 여타 모든 관서를 통제하는 지위를 가진 집사부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진덕여왕 5년에는 대당외교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면서 영객부(領客府)에 장관인 영(令) 2인을 설치하여 정비하였다.(‘삼국사기’ 진평왕 13년조의 영객부의 영 2인 설치 기사는 착오로 보인다) 영객부는 본래 왜전(倭典)이라고 칭했었는데, 진평왕 43년(621)에 영객전으로 고치고 왜전은 뒤에 따로 설치하였다. 그런데 진덕여왕대에 이르러 장관 2인을 두어 1급관서인 영객부로 격상시킨 것이다.

진덕여왕 5년에 설치된 관서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법률(律令格式)의 제정을 담당하는 이방부(理方府)를 새로 설치하여 영 2인, 경 2인, 좌(佐) 2인으로 정비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652)에 천효(天曉)를 이방부령으로 임명하였고, 그다음 태종무열왕 원년(654)에는 이방부령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심사하여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수정(修定)케 함으로써 율령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하였다. 뒷날 이방부는 더욱 강화되어 문무왕 7년(667)에 우이방부를 설치함으로써 좌우(左右) 이방부로 나뉘게 되었다. 또한 진평왕 8년(586)에 설치되었던 예부(禮部)의 조직도 정비하여 차관직인 경 2인과 실무직인 대사(大舍) 2인, 사지(舍知) 2인을 설치하고, 사(史) 3인을 증원함으로써 영・경・대사・사지・사로 이어지는 5등 관직으로 구성되는 1급관서로서의 조직을 완성하였다. 예부 조직의 정비는 교육과 외교, 의례 등을 관장하는 역할을 크게 강화한 것인데, 이러한 조치에 더하여 예부 소속의 중급 관서를 설치하거나 강화한 점도 주목된다. 예부 소속 관서인 국학(國學)・음성서(音聲署)・전사서(典祀署) 등에 각각 실무책임자인 대사 2인을 설치하여 교육・음악・제사 등의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특히 국학은 신문왕 2년(682)에 정식으로 발족되었지만, 진덕여왕 5년에 실무직을 설치한 것을 보아 유교 교육기관의 설립 계획은 이미 마련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창부 소속의 상사서(賞賜署)에 대사 2인, 공작과 기술 관서인 공장부(工匠府와 채전(彩典) 등에 각각 주서(主書) 2인을 설치함으로써 중급과 하급의 관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정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진덕여왕대는 불교교단에 대한 관리 감독의 조치도 마련되고 있었는데, ‘삼국사기’ 권40 무관조의 말미에 승관에 대한 규정이 언급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그에 의하면 최고의 승관인 국통(國統) 1인, 대도유나(大都唯那) 1인, 대서성(大書省) 1인 등의 승관직은 이미 진흥왕대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진덕여왕 원년(647)에 이르러 대도유나 1인과 대서성 1인을 각각 증원하여 불교교단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관리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뒤에 실시되는 국학의 설치를 통한 유교의 체계적인 교육, 그리고 불교와 구분되는 유교정치이념의 추구라는 의지와 무관할 수 없는 개혁조치였다.

진덕여왕 5년(651)의 행정관서 정비를 왕권 강화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때에 특히 주목되는 개혁은 왕궁의 수비와 국왕 행차 때의 의장을 담당한 시위부(侍衛府)를 설치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시위부는 앞서 진평왕 46년(624) 정월에 대감(大監) 6인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진평왕 44년(622) 내성사신을 설치하여 왕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조치에 이어 실제 왕실의 호위를 강화하려는 의지의 소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독립된 기구로 발족한 것은 진덕여왕 5년이었고, 시위감 6인은 신문왕 원년(681) 장군(將軍)으로 개칭됨으로써 완성되었다. 시위대는 3개의 부대로 이루어졌는데, 왕궁・양궁・사량궁 등 3궁의 수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며, 조직은 장군 6인, 대감 6인, 대두(隊頭) 15인, 항(項) 36인, 졸(卒, 先沮知에서 大舍의 관등의 소유자인 하급 장교) 117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로써 진덕여왕 5년의 정치개혁은 사실상 신라의 지배체제의 근간인 행정관서의 체계를 마련한 것이었고, 그 뒤 태종무열왕대・문무왕대・신문왕대의 관서정비는 진덕여왕대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보완하는 성격의 정비에 불과했다. 진덕여왕대까지 이루어진 행정관서 정비의 성과를 중심으로 해서 신라의 정치체제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면 크게 6부회의 전통을 계승한 귀족회의 대표인 상대등, 왕실의 관리를 책임지는 내성의 사신, 그리고 중앙행정관서를 총괄하는 집사부의 중시 등 3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삼국사기’ 권38~40은 직관(職官) 상・중・하 3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상편은 집사부 관할의 중앙행정관서를 모은 것이고, 중편은 내성 소속의 궁정 관사를 모은 것이고, 하편은 무관직과 외관직을 정리한 것이다. ‘삼국사기’ 직관지 상・중・하 3편의 요지를 정리하면, 먼저 상편은 제일 앞에 17등 관등을 나열하였다. 그리고 상대등의 설치시기만을 언급한 다음에 이어 특수 상위 관등인 대각간과 태대각간을 들고 있어서 상대등이 관직으로서 보다는 관등의 하나로 인식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고려시기의 관료인 김부식으로서는 6부족회의 전통을 계승한 상대등의 위상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나 신라본기에서는 상대등의 임면 사실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기록해주어 그 실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관등의 기록 다음에는 집사부를 필두로 하여 그 관할의 44개 중앙행정관서의 설치시기와 관원구성의 내용을 나열하였다.

다음 직관지 중편에서는 내성을 필두로 하여 내성에 소속된 궁정관사 71개, 그리고 애장왕 2년(801) 내성에서 분리된 어룡성(御龍省)과 그 소속의 궁정관사 35개와 동궁 소속 관사 9개 등 합계 115개의 관서가 나열되었다. 내성 소속의 관사는 대사(大舍)와 사(史)의 하위직인 2직계제(二職階制)를 기본으로 하는 약소한 관사들이고 그 직장이 세분화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내성 조직은 극히 광범한 직역(職域)을 분장하여 왕궁과 왕실 관리의 일반 행정적 관리의 직책뿐만이 아니고 왕실 고유의 지배영역과 왕실 소유의 생산물 공방 등을 장악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강력한 왕권의 정치적・경제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집사부 관할 중앙행정관서와 내성 소속의 관사의 인원수의 합계를 비교하면, 전자가 753인, 후자가 516인으로 계산되는데, 내성 소속 관사 가운데 인원을 밝히지 않은 관사 수가 115개 가운데 21개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후자의 인원이 더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신라 고대국가의 운영은 권력의 3각 축인 상대등・집사부중시・내성사신 사이의 견제와 균형 가운데 이루어졌는데, 태종무열왕대 이후의 강력한 왕권의 기반은 집사부와 내성이 제공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집사부 시중이 귀족화되어 갔던데 비해서 내성과 그 소속 관사들만은 뚜렷한 국왕의 근시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내성사신이 병부령을 겸직할 수 있었다는 점은 강력한 왕권의 직접적인 기반이 어디에 있었는지 시사하는 바 크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51호 / 2020년 9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