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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일본의 사리신앙 – 불교의 전래와 사리신앙의 의미

백제 성왕의 불교전파에 의해 사리신앙 시작

불교공인 30년 후 사리 영험 경험 한 뒤 목탑을 세워 사리 봉안
숭불파와 배불파의 싸움에서 사리영험 목도한 숭불파가 승리
쇼토쿠 태자의 ‘사탑건립' 서원이  일본 사리신앙 발전 전주곡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쇼토쿠 태자 초상화. 백제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가 597년 일본에 건너가 그렸다고 한다(‘일본서기’). 일본의 만 엔권 지폐에도 이 초상화의 쇼토쿠 태자 얼굴이 인쇄돼 있다.
일본 최초의 사찰인 호코지 목탑 심초석에서 발견된 아스카데라 목탑 사리장엄. 588년에 백제가 보내온 불사리를 담은 사리장엄으로 593년 1월15일에 목탑 심초석에 매납됐고, 3년 뒤 탑을 완성했다. 이 목탑은 1196년에 낙뢰로 불탔고 1956년 조사 때 사리장엄이 발견됐다.

우리와 일본은 지리적, 역사적으로 아주 가까워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해야 할 것 같은 두 나라인데,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이 워낙 깊고 커서 그런지 외려 서로를 외면하는 일도 적잖다. 이런 태도는 두 나라 사이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국가 간 교류는 호혜(互惠)를 바탕으로 한 상호작용이고, 더욱이 종교와 문화는 주고받는 양쪽 모두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일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불교가 발전하는 데는 우리나라 삼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사리신앙이 널리 확산하는 데도 우리의 도움은 큰 힘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일본에 처음 불교를 전한 나라는 백제였다. 이때 일본은 긴메이(欽明)천황(539~571) 대였고, 백제는 성왕(聖王, 523~554)이 다스리고 있었다. 성왕은 사신 편에 석가불상, 경전 등과 함께 편지를 보내어 “불교는 모든 법 중에서 가장 수승(殊勝)한 법이오.”하며 천황에게 불교를 적극 소개했다. 그 해가 538년(‘원흥사 가람연기’) 또는 552년(‘일본서기’)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522년에 시바 다치토(司馬達等)라는 사람이 초당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다는 기록(‘부상약기’)도 있는 등 이미 개인 간 전파 등으로 민간에 불교가 알려져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성왕으로부터 불교를 소개받은 흠명천황은 내심 기뻐했지만, 신하들 중에는 불교 반대파가 만만찮게 많아 불교를 맘껏 전파하지 못했다. 성왕이 보낸 불상도 궁중에 안치하지 못하고 찬성파 신하의 집에 모셔두도록 해야 할 정도였다. 

불교 공인 30여 년 뒤에 최초의 사리영험이 일어났다. 584년에 대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자택에 백제가 보내준 미륵석상을 모시고 불법을 크게 열었을 때였다. 재가 끝나고 재식(齋食)을 먹으려는데 밥그릇에 갑자기 불사리 1과가 나타났다. 소가노는 처음에는 이것이 진짜 불사리인지 반신반의했다. 그래서 사리를 쇠망치로 내리쳐봤는데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물속에 넣어봤는데 마음속으로 바라는 대로 가라앉거나 뜨거나 하였다. 소가노는 그제야 크게 감동하여 더욱 불교를 돈독히 믿게 되었고, 자택을 절로 바꾸어 도요우라테라(豊浦寺)라고 했다(‘원흥사 가람연기’). 또 이듬해 2월15일에 목탑을 세워 전년에 얻은 불사리를 봉안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 사리신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김춘호, ‘고대 일본의 사리신앙’, 2014). 

이때만 해도 불교가 전국으로 널리 전파되지 못한 채 호족 등 일부 계층에서만 숭불(崇佛)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587년에 숭불파와 배불파 간 대립이 격화하면서 급기야 두 진영은 무력충돌하기까지 이르렀다. 백제와 신라로부터 여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본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쇼토쿠(聖德, ?~622) 태자와, 불사리 영험을 직접 목격했던 소가노우마코 등을 중심으로 한 숭불파는 불교 도입을 극력 반대하는 배불파와 일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패전을 거듭했으나, 전승기원법회를 열어 쇼토쿠 태자가 만일 전쟁에서 이기면 전국에 사탑(寺塔)을 지어 불교를 세상에 널리 전하겠다고 서원한 뒤 전세가 급변했다. 심기일전한 숭불파가 전열을 가다듬어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약 200년가량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이후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며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막혔던 국제 불교교류의 물꼬를 터서 선진 불교문화를 들여온 게 큰 동력이 되었다. 일본이 가장 적극적으로 교류한 나라는 불교를 처음 전해주었던 백제였다. 588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사찰 건축 관련 전문가 집단인 조사공(造寺工), 노반박사(露盤博士), 와박사(瓦博士), 화공(畵工) 등을 보내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지은 절이 일본 최초의 사찰로 지금은 아스카데라(飛鳥寺)로 바뀐 호코지(法興寺)다.

일본이 불탑 전문가인 노반박사를 특별 요청한 것은 탑 건립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앞서 배불파와의 전투가 한창일 때 쇼토쿠 태자가 ‘사탑 건립’을 서원했던 데 대한 실천으로 보인다. 탑은 곧 사리신앙을 위한 것이므로, 쇼토쿠 태자의 이 서원은 사리신앙 발전의 전주곡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백제는 그 전인 577년 부여에 당시 최대 규모의 왕흥사 목탑을 완공했고, 이 경험이 일본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일본을 ‘목탑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아름답고 오래된 목탑이 많이 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 사리신앙이 발전하는 데는 앞에서 본 것처럼 여러 차례 불교문화 관련 지식을 일본에 전해주었던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8)의 덕이 컸다. 위덕왕은 성왕의 아들로서 부왕이 일본에 불교를 처음 전해준 숭고한 뜻을 계승했던 것이다. 더욱이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阿佐太子)도 59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고 하니(‘일본서기’), 그야말로 부전자전으로 3대에 걸쳐 일본과 깊은 인연을 맺은 셈이다. 1995년에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567년에 만든 석조 사리감(舍利龕, 사리를 넣는 시설)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에 위덕왕의 어릴 적 이름인 ‘창(昌)’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위덕왕은 평소 불사리를 상당히 존숭했던 것 같다. 일본에까지 불사리를 전했던 그의 행적이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백제 외에 신라도 일본의 사리신앙 발전에 일조했다. 641년에 신라 선덕여왕이 사신을 보내어 금불상과 금탑 그리고 불사리를 전해주었다. 불상은 교토의 하나데라(秦寺, 현 廣隆寺)에, 불사리는 오사카 난바(難波)의 시텐노지(四天王寺)에 봉안했다. 

이처럼 일본 불교 초전 시기에 백제, 신라로부터 불사리가 들어옴으로써 사리신앙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8세기 이후에는 중국에서 한번에 1000과 또는 3000과씩 대규모로 모셔오기도 하는 등 사리를 얻는 경로가 다양화되었지만, 7세기 불교가 이제 막 발전하기 시작했던 일본에서 사리신앙이 발전하는데 있어서 최대 협력자는 바로 백제와 신라였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51호 / 2020년 9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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