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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고승 진영 조각 ‘건칠희랑대사좌상’ 국보된다

  • 성보
  • 입력 2020.09.02 13:56
  • 수정 2020.09.04 20:23
  • 호수 1552
  • 댓글 0

문화재청, 9월2일 국보로 지정예고
국내 최고‧유일 고승 진영 조각품
국내 흔치 않은 건칠 기법으로 제작
세밀한 주름 등 사실적 표현 돋보여
가슴 구멍으로 ‘흉혈국인’이라 불려

9월2일 국보로 지정예고 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정면. 문화재청 제공.
9월2일 국보로 지정예고 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정면. 문화재청 제공.

국내 유일 승려 진영 조각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이 국보로 승격된다.

문화재청은 9월2일 “보물 제999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을 국보로 지정예고한다”고 밝혔다.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은 신라 말~고려 초 활동한 스님으로 해인사 조사였던 희랑대사(希朗大師)의 진영을 조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조각으로 고려 초인 930년 이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희랑대사가 주지로 있던 해인사에 소장돼 있다가 1989년 4월 보물 제999호로 지정됐다. 유사한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의 모습을 조각한 조각상을 많이 제작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으며 ‘희랑대사좌상’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으로 전래되고 있다.

조선 시대 문헌기록에 의하면 ‘희랑대사좌상’은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 진상전(眞常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됐다.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해인사 기행문인 ‘가야산기(伽倻山記)’에 조선 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이 남아있어 전래경위에 대해 신빙성을 더해준다.

지정조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의 과학 조사 결과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삼베 등에 옻칠해 여러 번 둘러 형상을 만드는 건칠(乾漆)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이 기법으로 만든 불상을 보통 ‘건칠불’이라 부르는데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정성이 요구된다.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들었는데 후대의 변형 없이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면과 뒷면을 결합한 방식은 보물 제1919호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처럼 신라~고려 초 해당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조각에서 확인되는 제작기법이어서 ‘희랑대사좌상’의 제작시기를 유추하는데 참고가 된다.

문화재청 제공.
9월2일 국보로 지정예고 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얼굴. 문화재청 제공.

'희랑대사좌상’은 극사실적인 표현들이 돋보인다.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 체구, 자비로운 눈매, 우뚝선 콧날, 얇은 입술에 번지는 잔잔한 미소,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에서 노스님의 인자한 모습과 함께 생동감 넘쳤던 생전의 모습을 연상하기 충분하다는 평을 받는다. 손의 힘줄과 손가락뼈, 쇄골도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얼굴의 세밀한 주름은 희랑대사의 나이와 연륜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높이 82cm로 육체의 굴곡과 피부 표현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선 후기 조성된 ‘신륵사 조사당 목조나옹화상(神勒寺 祖師堂 木造懶翁和尙, 1636년)’ ‘괴산 각연사 유일대사상(槐山 覺淵寺 有一大師像, 조선 후기)’ 등 다른 조각상들과 달리 관념적이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장삼 위에 가사를 착용한 ‘희랑대사좌상’의 착의법은 당나라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흰 바탕에 붉은색과 녹색 점을 섞어 꽃무늬처럼 그려 넣은 장삼을 입고 그 위에 붉은 바탕에 녹색 띠가 있는 가사를 걸치고 있는데 이는 많은 천을 기워 만든 분소의(糞掃衣)를 나타낸 것이다. 가사 아래로 금색이 드러나 있는데 원래 도금됐던 것으로 추정돼 화려했던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희랑대사좌상’은 ‘가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인 흉혈국인(胸穴國人)이라고도 불린다. 별칭을 상징하듯 가슴에 폭 0.5cm, 길이 3.5cm의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해인사에는 이 흉혈은 모기가 들끓어 스님들이 수행하기 힘들어하자 희랑대사가 스스로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구전이 전해진다. 하지만 고승의 흉혈이나 정수리에 난 정혈(頂穴)은 보통 영험함과 신통력을 상징하며 유사한 모습을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1024년, 보물 제 1000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청 제공.
9월2일 국보로 지정예고 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뒷면. 문화재청 제공.

희랑대사는 태조왕건의 스승으로서 고려건국에 큰 힘을 보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해인사에서 북악파의 중심이었다. 신라의 화엄학은 의상 스님을 그 효시로 하는데, 말기에는 남악과 북악으로 나누어졌다. 두 학파의 창시자는 관혜 스님과 희랑대사다. 희랑대사의 구체적인 생존 시기는 미상이나 조선 후기 학자 유척기(俞拓基, 1691~1767)의 ‘유가야기(游加耶記)에 따르면 고려 초 기유년(己酉年, 949년 추정) 5월에 나라에서 시호를 내린 교지가 해인사에 남아 있었다고 해 949년 이전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으로 해인사 산내암자인 희랑대(希朗臺)에 머물며 수도에 정진했다고 알려졌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도움을 주어 왕건이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해인사 중창에 필요한 토지를 하사했다고 전한다.

전문가들은 ‘희랑대사좌상’은 동시기 중국과 일본의 고승 초상조각 사례처럼 입적한 고승에 대한 추모를 위해, 더 나아가 해인사와 고려 왕실의 돈독한 관계를 널리 알리고 사찰의 위상을 높이고자 제작됐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승 입적 후 부도와 탑비 건립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부득이한 상황에서 건립이 불가능한 관계로 진영상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진영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문헌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있는 조사상은 ‘희랑대사좌상’이 유일하며 제작 당시 현상이 잘 남아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면의 인품가지 표한현 점에서 예술 가치도 뛰어나다”며 “후삼국 통일에 이바지했고 불교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희랑대사라는 인물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뚜렷한 제작기법 등을 종합해 볼 때 ‘희랑대사좌상’은 고려 초 10세기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자 희랑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조각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예술‧학술 가치가 탁월하다”고 말했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문화재청 제공.
9월2일 국보로 지정예고 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손.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제공.
9월2일 국보로 지정예고 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 옆면.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제공.

 

[1552호 / 2020년 9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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