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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교수 “불설 비판적 분석 않으면 불교학자 아니다”

  • 교학
  • 입력 2020.09.04 11:39
  • 수정 2020.09.04 19:33
  • 호수 1552
  • 댓글 14

권오민 경상대 교수 ‘한국불교학’서 불교학계 통렬히 비판
교설 그대로 이해하고 신봉하는 것은 수행자나 포교사 몫
한글대장경·티베트·범어 번역 한계 명확…내용 파악 불가능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성전(불설)의 말씀을 잘 이해해 강의하고 저술하는 것, 혹은 선정을 통해 직접 경험하는 것은 불교학자 본연의 임무가 아니다. 이는 불교신행자나 수행자의 몫이다. 불교원전에 대한 비판적 분석 없이 다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특정불교를 시간적 공간적 맥락의 고려 없이 주어진 대로 거기서 설하고 있는 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교학이 아니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한국불교학’ 제95집에 게재한 논문 ‘불교전통에서의 불교학, 우리 시대의 불교학’(한국불교학회 2020년 하계워크숍 발제 논문)에서 국내 불교학계를 통렬히 비판했다. 권 교수의 주장은 오늘날 불교학자들의 일반적인 역할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권 교수는 불교학의 정체성을 문(聞)·사(思)·수(修)의 3혜 중 사혜(思慧)에서 찾았다. 그는 문혜(聞慧)가 개념적·외적·의타적 진리인식이라면 사혜(思慧)는 비판적·내재적·주체적 진리인식, 수혜(修慧)는 확증적·신념적 진리인식으로 각각 규정했다.

권 교수에 따르면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시대와 지역에 따라 사상적 변모를 거듭했고 수많은 성전이 편찬됐다. 그 원동력은 합리적 추론 등 이성적 사유를 통해 획득되는 사혜(思慧)에서 비롯됐다. 이를 통해 기존 성전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뤄지고 새로운 이해도 모색될 수 있었다. 불교의 철학사는 어떤 종교나 철학보다 역동적이었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불타의 유훈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정리(正理)와 법성(法性)을 의지처로 삼는 불교전통이 확립됐으며 불설이 다만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었기에 불교는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면서 방대한 탐구의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따라서 불법에 대한 비판적 탐구의 역사가 불교사상사이기에 불설을 잘 이해하고 기억해 강의와 저술하는 것은 불교학자 본연의 임무가 아니라는 게 권 교수 주장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불교를 주어진 대로 이해하는 것은 다만 종학(宗學), 시공을 초월하는 종교적 이념일 뿐이며 탐구가 아닌 믿음의 대상일 뿐으로, 이는 교리적 갈등과 투쟁의 원천이었다. 어떤 특정 경론의 교설을, 더욱이 다른 경론의 그것과는 상충되는 교설을 거기서 설하고 있는 대로 이해하고 신봉하는 일은 특정 종파의 수행자나 포교사, 신자의 몫이지 불교학자의 몫은 아니다.”

권 교수의 이 같은 지적대로라면 오늘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불교학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셈이다. ‘불교학자의 몫은 의심과 탐구, 거기까지다’라는 권 교수가 불교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의심의 결여를 꼽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행자나 불교신자에게 있어 믿음은 중요하겠지만 사혜를 추구하는 불교학에서 믿음(信心)을 앞세울 경우 의심도 문제도 없으며, 의심도 문제도 없다면 이를 더 이상 학(學)이라 말하기 어렵다. 불교학에서는 ‘그 말씀이 왜 거기서 나와?’라고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성전의 말이 신탁의 계시가 아닌 이상 필경 전후맥락에 따른 곡절이 있을 것이고, 불교학에서는 이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불교학에서의 믿음은 탐구결과로서의 확신이어야 한다.”

‘현대판 아비달마 논사’라는 권 교수의 직설적이고 날선 비판에 “불교학과 믿음의 분리” 등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불교학자들이 반론에 나설지 아니면 외면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사진은 불교학계가 주관한 학술대회 모습. 법보신문 자료사진.
‘현대판 아비달마 논사’라는 권 교수의 직설적이고 날선 비판에 “불교학과 믿음의 분리” 등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불교학자들이 반론에 나설지 아니면 외면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사진은 불교학계가 주관한 학술대회 모습. 법보신문 자료사진.

권 교수는 불교가 결코 전통과 권위에 따른 진리체계를 신봉하는 종교가 아님을 거듭 역설했다. 중관학파에서 자립논증을 내세우고 최초로 유식삼성설을 비판한 청변의 ‘성전이 성전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론적 타당성을 갖고 진실지(眞實智)와 해탈을 지향하는 논리적 사고와 상응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인용한 뒤 오늘 우리 학계에 불교에서 지혜를 일컫는 ‘비판적 분석’이 작동하는지를 되물었다.

권 교수는 불교가 불타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됐다면 “그는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고, 왜 깨달았으며, 그를 따르는 불교도는 무엇을 어떻게 깨닫고 탐구해야 하는가”가 불교학자의 일차적 관심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불교학자는 오로지 믿음을 통해 진리성을 승인하고 그 전파에 힘쓰는 포교사나 의심과 비판(즉 사유)은 배제한 채 다만 선정이라는 직접경험을 통해 진리성을 확인하려는 수행자와 구별돼야 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현대의 철학자가 철학사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듯 어제의 불교학자(논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의 불교학자 또한 불교사상사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 교수는 학계의 번역 풍토도 비판했다. 한글대장경이 완역 됐다고는 하지만 거기서의 언어는 살아있는 언어가 아니며, 그것을 통한 내용 파악 및 이론적 이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원인이 당해 경론이 추구했던 지식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 비롯됐다고 보았고, 범어나 티베트어 원전번역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아비달마 논사들의 논쟁에서 가장 심한 말은 뜻은 없고 말만 있을 뿐이라는 ‘유언무의(有言無義)’였지만, 오늘날엔 뜻은 고사하고 말도 되지 않는 말들이 넘쳐나는 ‘무언무의(無言無義)’로 시대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교학자들은 “깨달음의 세계는 미묘해 말하기 어렵다거나 내 머리의 아둔함을 탓할 뿐 ‘무언무의’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했다.

권 교수는 “응용불교라는 정체불명의 학문분과를 불교학자가 아닌 해당분야의 학자들로 하여금 불교학과 통섭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사유로도 독해할 수 있는 불교성전의 번역이 관련 불교학자에 의해 나와야 한다”며 “철지난 외국의 불교개론서를 번역하는 일은 이제 부끄러운 일이다”고 비판했다.

‘현대판 아비달마 논사’라는 권 교수의 직설적이고 날선 비판에 “불교학과 믿음의 분리” 등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불교학자들이 반론에 나설지 아니면 외면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52호 / 2020년 9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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