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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승가대학장 정한 스님

“내 안에 있는 위대함 발견해 이웃에게 친절로 베푸세요”

나무처럼 굳건하고 하늘처럼 넓은 마음으로 따뜻한 태양처럼 주변을 감싸는 사람
냇물처럼 부지런하고 작은 이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사람 되는 것이
부모와 조상 은혜를 갚는 삶의 자세…그런 이들이 많아진다면 마침내 불국토 될 것

백중은 조상님들을 위로하고 조상님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또한 나를 위하는 기도 날이기도 합니다. 이런 날을 맞이해서 조상과 나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은 부모님, 조상님 나아가 주변 사람들의 은혜를 알고 갚는 것이 훌륭한 일이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왜 은혜를 알아야 될까요. 찰스 로퍼(Charles Roper) 박사가 쓴 ‘나는 들었다’는 시의 일부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다.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맡겨라. 너그럽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고 날아보아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다.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스함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라가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작은 풀물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겸손하라. 단순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에 귀를 기울여라. 

나무는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맡기라고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우뚝 서 있나요? 우뚝 서 있다는 것은 나에게 주체성과 주관과 신념이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가질 때 잘났다, 못났다, 잘한다, 못한다는 주변의 여러 이야기들에 대해 현혹되지 않고 비난에도 감정이 요동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화를 내거나 소리를 높일 일도 없습니다. 주체성, 주관성이 없으면 주변의 행동이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해야하는 지 잘 아는 사람은 주변인들의 말이나 행동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우뚝 서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비난받거나 비방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일희일비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철저히 자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 때 너그럽게 굽힐 수도 있습니다. 너그럽다는 것은 상대를 배려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스스로의 위대함을 알고, 내가 갖고 있는 뛰어난 점을 남을 위해 사용할 때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늘의 말을 들었다입니다. 하늘이 마음을 열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형상, 모습, 형체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크기를 알 수 없습니다. 좁아지면 바늘 하나 꼽을 수 없지만 넓히면 하늘만큼 넓어집니다.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좁은 마음이라면 상대의 말 한마디에도 견딜 수 없지만 하늘같은 마음은 어떨까요. 하늘은 흐릴 때도 있고 비가 올 때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 그것을 모두 품는 것이 마음을 하늘 같이 여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면 경계와 담장을 허물게 됩니다. 경계란 나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상황들입니다. 마음을 열면 그 모든 상황들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미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원망하는 대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역경은 성숙된 인품을 만들어 가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모든 것에 걸림없는 마음, 수용할 수 있는 마음, 열린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태양이 하는 말은 다른 이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태양은 따뜻합니다. 태양이 없으면 밝음도 없습니다. 태양은 모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처럼 다른 이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의 은혜를 입었고 성장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은덕을 입습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안다는 것은 내 자신이 바른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본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주위 사람을 돌보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끝없이 흐르는 냇물은 느긋하게 흐름을 따라가라고 합니다. 여유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일을 당장 처리해야 할 것처럼 조급해집니다. 하지만 일이 해결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마음에 여유를 갖고 대처해야 실수가 없습니다. 또 쉬지 말고 움직여야 합니다. 노력입니다. 냇물이 끝없이 흘러가듯 날마다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냇물은 또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의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또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념이 있다면 내 행동, 말에 대해 의문점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이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말을 해 놓고 후회하곤 합니다. 특히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때는 크게 후회하게 되죠. 혹시라도 감정에 휘둘려 말을 잘못했다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경책하고 상대에게 주저하지 말고 사과하세요. 

마지막은 작은 풀들의 말입니다. 겸손하라, 단순하라. 겸손을 절집에서는 하심이라고 하죠. 계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나는 어른이다, 나는 크다, 나는 높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낮춰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귀한 존재입니다. 누구에게도 상대를 무시하거나 깔볼 권리는 없습니다. 모두가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부처님께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선언하신 뜻은 모든 중생이 존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도 있습니다. 나의 장점을 알고자 노력하면 타인의 장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단점에만 머물지 말고 타인의 단점만 보아서도 안됩니다. 그럴 때 겸손해집니다. 나 자신의 위대함을 아는 사람이 타인의 위대함도 발견하고 찬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부처님 사는 세상입니다. 서로 위해주고 찬탄해주는 세상입니다. 그 출발은 겸손입니다.

또 단순하라고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도 끝나면 뭘 할지 생각하느라 법문에 집중 못하는 분도 계실겁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세요. 그것이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 순간에 집중한다면 상대와 관계가 불편해질 이유도 없습니다. 

끝으로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에 귀를 기울이라 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쓸모가 있기 마련입니다. 모래 한 알은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모이면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쌀 한 톨이 모여 밥이 됩니다. 이와 같이 나라는 존재는 아주 작은 존재일 수 있지만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한 요소, 한 축을 맡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면 내 훌륭한 점을 발견해 부처님과 같은 성인의 지위에 오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고 부모님의 은혜를 갚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거듭 당부드립니다. 늘 주위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 겸손과 친절을 베풀 때 내 안에서는 교만, 아상이 없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을 빼고, 하루 잠자는 시간을 빼고, 일하는 시간을 빼면 우리가 주위 사람들과 대화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가급적이면 겸손과 친절을 배푼다면 그들이 나를 아름답고 좋게 기억할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을 때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이가 해주었으니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은 단순히 빚을 갚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은 말과 행동은 반드시 큰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작은 씨앗을 하나 심었을 뿐인데 가을이 되면 많은 열매가 열리듯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가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를 직접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주위 사람들과 특히 가족에게 자주 사랑을, 감사를 표현하면 그 결과는 나이가 들어 여러분 자신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날마다날마다 좋은 씨앗을 뿌리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자는 겁니다. 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 인격과 인품이 그 만큼 성숙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부처, 공자, 맹자, 예수같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 차이때문입니다. 그분들만큼 훌륭한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이것은 내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나의 내면을 잘 다스려서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은 부처님, 공자님 같은 성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등불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앞길을 밝혀주어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모든 이들이 그리워하는 사람, 추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일상에서 자신의 위대함을 찾고 그것을 주위 사람들과 끝없이 나누시길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8월24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경선 스님) 설법전에서 봉행된 ‘백중지장기도 및 생전예수재 11재 법회’에서 정한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52호 / 2020년 9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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