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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몸과 마음은 동전 없는 동전의 양면

공(空)한 ‘나’의 물리적 표현이 몸, 심리적 표현은 마음

전통적으로 서구에선 영혼과 동일시되는 마음을 몸보다 중시
스피노자는 몸·마음을 하나의 실체를 가진 두 양상으로 간주
불교에서는 실체 인정 않기에 몸과 마음은 공한 나의 두 양상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전통적으로 우리는 인간을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여겨왔다. 한국어에서는 “몸과 마음”이라는 표현이 일상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몸과 마음을 언급하는 순서가 흥미롭다. 영어권에서는 “mind and body”라고 하지 “body and mind”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과 마음을 동일시해 온 서구인들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마음이 몸보다 더 중한가 보다. 몸과 마음이 한자어로는 심신(心身)인데, 중국어로도 마음이 몸보다 먼저 오기는 한다. 그런데 ‘心’자가 마음을 뜻하지만 원래 그리고 지금도 몸의 일부인 심장(heart)도 가리킨다. 글자가 생긴 모양부터 그렇다. 이렇게 보면 중국인들은 몸과 마음이 그리 분명히 분리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대인들은 추상적인 마음이나 영혼의 존재를 상상하기 어려워했다. 우리는 아직도 ‘조상의 숨결’같은 멋진 표현을 쓰는데,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몸에 있는 ‘생명의 숨결’이 생명을 유지해 준다고 보았다. 사람이 죽게 되면 이 숨결이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진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고대 인도 바라문교의 아뜨만론과 윤회설에 영향 받은 것이 거의 분명한 피타고라스학파가 영혼 윤회설을 가르쳤고, 이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플라톤의 영혼 윤회설이 기독교의 영혼불멸설을 성립했다는 것이 서구학계의 정설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기독교를 믿어 온 서구인들이 영혼과 동일시되는 마음이 몸보다 소중하다고 믿어 온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2000년 가까이 불멸의 영혼을 믿어 온 서구에서도 20세기 이후 과학적 심리학과 뇌신경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의식이란 결국 뇌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이라는 견해가 일반 상식으로 굳어져 왔다. 그러다보니 불멸의 영혼을 믿어 본 적이 없는 동아시아인들이나 피타고라스 이전 고대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서구인들도 마음 또는 의식을 보다 물리적으로 이해해 가고 있다. 과학에 대한 신뢰는 높아가지만 기독교의 영향력은 점점 더 낮아져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추세는 계속되리라 예상된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스피노자는 몸과 마음을 바라보는 독특한 이론을 전개했다. 그의 견해는 유대교 고유의 인간관과도 관련 있는데,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불멸의 영혼을 믿은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그는 몸과 마음 또는 물리세계와 심리세계는 하나의 실체(substance)가 가진 두 양상(mode)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를 비유로 설명해 보겠다. 카멜레온은 피부색이 일곱 가지로 변한다. 여기서 존재하는 동물은 하나지만, 이 동물은 일곱 가지 다른 빛깔로 (다른 양상으로) 존재한다. 나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홍창성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나는 영어로 철학을 가르치는 Chang-Seong Hong이다. 이 사람들은 나를 ‘홍창성’이 아니라 ‘췡시앙 항’으로 부른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로 강의하는 홍창성’과 ‘영어로 강의하는 췡시앙 항’의 두 양상으로 존재한다. 이밖에도 나는 수많은 다른 양상으로도 존재한다. 딸쌍둥이 아빠, 불자, 50대 중반 한국인 남성 등등.

스피노자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몸이 마음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음이 고상한 사고(思考)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몸보다 상위에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그는 몸과 마음이 (또는 물리세계와 심리세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한 실체의 두 양상이라고 본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견해는, 그가 독립적 존재의 실재를 받아들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몸과 마음의 비(非)실체적·현상적 존재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과 가까운 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인간관은 그 차원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엄밀하고 정교하게 발전해 왔다.

스피노자보다 22세기 이상 앞선 오랜 옛날 붓다는 이미 그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는 실체의 존재를 부정(否定)하면서 인간을 찰나마다 생멸하는 다섯 가지 다발로 설명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五蘊)이 그 다발들이다. 모양을 갖추어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몸이 색(色)이고, 모양이 없어 단지 이름(名)만 있는 네 가지 의식상태가 수상행식(受想行識)이다. 붓다는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다고 보는 인간 존재를 이와 같이 오온으로 분석하고 이해했다. 어떤 실체에도 의존하지 않는 우리의 오온은 각각 끊임없이 생멸하고, 서로 상호작용하며 변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오온과도 상호작용하며 생멸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의식이 그 물질적 기반인 뇌의 작용에 의존한다고 판단하지 않는가? 즉, 수상행식(마음)이 색(몸·뇌)에 의존하기 때문에 오온은 결국 모두 색으로 환원되어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은 순전히 물질적인 존재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데 스피노자의 견해가 다음과 같이 도움 될 수 있다.

과학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로 된 몸이 그렇지 못한 의식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느끼곤 한다. 이 느낌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기 위해 다음과 같이 가정해 보자. 내게는 현재 ‘한국은 동북아시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다. 지금 여기 어떤 사건(event)이 일어나고 있다. 이 사건은 ‘한국은 동북아시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다’는 내용을 가진 의식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동시에 뇌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전기 작용과 화학변화를 포함하는 어떤 물리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 하나의 동일한 사건은 물리적 관점에서 보면 뇌 표면의 전기화학반응이고 심리적 관점으로는 한국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믿음이다. 이와 같이 의식상태와 물리적 상태는 어떤 한 사건의 두 양상(mode)으로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마음과 몸이 ‘나’라는 실체의 두 양상이라고 보지만, 무아(無我)의 가르침으로 이런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그냥 두 양상(두 가지 종류의 현상)만이 존재한다고 보게 된다. 인간(과 그밖에 모든 사물)은 실체 없이 현상으로만 존재한다는 붓다의 가르침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붓다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도 극히 혁명적인 견해다. 이를 대승의 공(空)의 관점으로 접근해 본다면, ‘자성(自性)이 없어 공한 나(?)에 대한 물리적 표현이 몸이고 심리적 표현이 마음이다’고 서술해 봄직도 하다. 몸과 마음은 공한 나의 두 양상으로, 마치 동전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 보인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52호 / 2020년 9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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