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제33칙 투자겁화(投子劫火)
34. 제33칙 투자겁화(投子劫火)
  • 김호귀 교수
  • 승인 2020.09.14 16:48
  • 호수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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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서 부들부들 떨린다”

어리석은 납자 표현한 말이지만
승의 마음 인정한 의미로 활용
안목 걸맞은 답변 하라는 요구

한 승이 투자에게 물었다. “겁화가 밝게 타오를 때는 어떤 상황입니까.” 투자가 말했다. “추워서 부들부들 떨린다.”

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선사는 호흡을 관찰하는 안반관(安般觀)을 수습하였고, 화엄교학도 연찬하였다. 취미무학(翠微無學)에게 참문하여 선법의 종지를 돈오하였다.

여기에 제시된 문답은 어떤 승이 찾아와 ‘인왕경’ 호국품의 게송을 가지고 질문한 것이다. 천라국이라는 왕에게 반족이라는 태자가 있었는데 어서 왕위에 오르고자 하였다. 태자의 스승인 나타(羅陀)라는 외도는 태자에게 왕의 머리 천 개를 취하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부추겼다. 반족태자는 999명의 왕을 잡아 머리를 취하였는데 마지막으로 보명왕의 차례였다.

보명왕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반족태자에게 청하여 하루 말미를 얻어 과거칠불의 법식에 따라서 백고좌법회를 열어 100명의 법사에게 공양을 올렸다. 제일법사는 왕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을 설하였다. ‘괴겁의 시대가 되어 겁화가 크게 타오르면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파괴되고 수미산과 큰 바다도 모두 재가 되리라. 운운’ 보명왕의 권속들은 모두 공을 터득하였고, 보명왕은 허공등정(虛空等定)을 터득하였다. 그러자 반족태자는 보명왕의 행위에 대하여 의문이 들었지만 그 자리에서 그 게송을 함께 들었는데, 마음이 열리더니 이윽고 깨침의 안목이 열렸다. 그리하여 반족왕은 마침내 국가를 동생에게 부촉하고 출가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

겁화가 일어날 때의 상황에 대한 승의 질문에 투자는 ‘추워서 부들부들 떨린다’고 답변하였다. 투자의 답변은 군더더기가 없이 간명직절(簡明直截)한 것이었다. 겁화의 상황은 마치 천지가 하나의 용광로가 되어 삼라만상을 치열한 불꽃으로 태워버리는 곳으로 안팎이 온통 붉은 불빛으로 가득한 모습이다. 투자는 그러한 열뇌처(熱惱處)에서도 오히려 청량한 바람을 피워낼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답변이다. 이것은 마치 역설적이지만 질문자와 답변자 사이에 서로 자기의 머리를 내어줄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의 머리를 취할 것인가 하는 치열한 법거량으로서 냉엄한 선문답의 실태이다. 문답상량의 장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까닭에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자마자 그 자리에서 곧바로 얼어버리는 꼴이고, 눈과 서리조차도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극한 상황이며, 목을 잔뜩 움츠리고 길게 탄식하는 것이고, 평평한 길을 가다가 갑자기 길바닥에 나부라지더니 죽어 엎어지는 모습이다.

총림에서는 흔히 사용하고 있는 말로 불쾌칠통(不快漆桶)이 있는데, 설봉의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투자대동과 설봉 사이에 행해진 네 차례의 문답에서 나온 말로서, 투자가 설봉에게 ‘칠통과 같이 멍청하다’고 말한 것은 짐짓 꾸짖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긍정해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칠통과 같다는 말은 납자이면서도 불법에 대하여 아무런 이치도 모르고 상황파악도 못하며 설법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핀잔을 주거나 나무라는 말로 활용된다. 그러나 여기의 문답에서 투자는 칠통이 가지고 있는 그와 같은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겁화가 밝게 타오를 때의 상황에 대하여 묻고 있는 승의 마음을 충분히 인정해주는 의미로 활용하고 있다. 승처럼 겁화에 대하여 질문할 줄 아는 납자라면 이제 나아가서 그 질문에 자신이 답한 ‘추워서 부들부들 떨린다’는 말의 의미까지도 한번 헤아려보라는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투자 자신의 답변처에 대한 승의 이해를 제대로 점검해볼 수 있는 기회이면서 질문한 승으로 하여금 스스로 안목에 걸맞은 답변을 내놓아보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승은 더 이상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못하였다. 투자가 승에게 추워서 부들부들 떨린다는 답변은 다름이 아니라 일찍이 설봉에게 답변해준 ‘칠통과 같이 멍청하다’는 찬탄의 말이었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53호 / 2020년 9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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