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54)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⑧ - (3) ‘중고’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 상
84.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54)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⑧ - (3) ‘중고’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 상
  • 최병헌 교수
  • 승인 2020.09.14 17:39
  • 호수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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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강화와 지배체제 정비는 불교공인과 일체화된 개혁과정

신라의 불교공인, 삼국 중 가장 늦었지만 불교전래는 늦지 않아
지방세력 등장한 유력 농민과 부유 상인이 불교를 선구적 수용
불교공인으로 왕권 격상…불교 수용 과정이 왕권 신성화 토대 
울주 천전리 각석계곡 전경. 울주군 울주경관실록 제공
울주 천전리 각석계곡 전경. 울주군 울주경관실록 제공

신라의 불교공인은 3국 중 가장 늦어서 23대 법흥왕 14년(527)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150여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늦은 것은 아니었다. 13대 미추이사금 2년(263) 고구려 승려 아도가 일선군(선산)의 모례(毛禮)에게 와서 불교를 전도하였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설화이지만, 김씨가 왕위세습권을 확립한 때인 17대 내물마립간 26년(381)에 중국의 북조왕조인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하여 호불군주로 유명한 부견(苻堅)을 면대케 하였던 사실은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진은 곧 멸망하였고, 전진과의 교류를 중개해 주었던 고구려와 대립관계로 변함으로써 공적인 불교전래 길은 막히고 말았다.

19대 눌지마립간대(417~458)는 왕위 부자상속제를 확립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이어 17년(433) 고구려 간섭배제를 위해 백제와 동맹을 체결해 공동대응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마립간이라는 왕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왕을 17대 내물마립간으로 전하는 반면, ‘삼국사기’에서는 19대 눌지마립간으로 전하고 있는데, 내물마립간과 눌지마립간 양대에 각각 왕권강화와 국가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두 역사서의 주장은 각기 나름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는 20대 자비마립간대(458~479)를 거쳐 21대 소지마립간대(479~500)에 이르는 동안 나제동맹을 통하여 고구려의 진출을 막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소지마립간 15년(493)에는 한성을 뺏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동성왕과 정략결혼을 통하여 동맹을 더욱 굳게 하였다. 그러나 눌지마립간대부터는 불교가 전래되고 있었고, 그 다음 소지마립간대에는 분수승(焚修僧)이 왕궁에까지 출입하였던 사실이 확인되는데, 그것은 국가 사이의 공적인 교류가 단절된 가운데 고구려로부터 국경을 넘어온 승려들에 의한 개인적인 전도활동을 통해서였다. 고구려로부터 불교의 전도를 위해서 국경을 넘어왔던 승려들 가운데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垢玼) 등이 연이어 죽임을 당한 것은 이러한 국제관계 속에서 일어난 순교사건이었다.

불교전래 설화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일선군(善山) 지역의 모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소백산맥을 넘어서 경상도 지역으로 통하는 주요한 교통로는 두 길이 있었는데, 계립령(조령)과 죽령을 넘어오는 길이었다. 그 가운데 계립령을 넘으면 문경-상주-선산-대구-경주로 연결되며, 죽령을 넘으면 영주-안동-영천-경주로 연결되어 북방으로부터 철기문화를 비롯한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었다. 따라서 교통로상의 요지인 선산지역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선구자로써 모례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영주지역에서 연화문벽화의 고분이 발견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일선의 모례나 영주의 벽화고분을 남긴 주인공은 그 지역의 유력한 세력가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4~6세기 철제농기구의 사용으로 인한 농업기술의 발달과 농업생산성의 향상은 읍락공동체 내에서의 계층분화를 가져왔으며, 토지와 생산기술을 소유한 부유층과 토지에서 유리되는 빈민층으로 나눠지게 되었다. 이러한 읍락공동체의 해체와 이로 인한 계층의 분화과정에서 새로운 지방 세력으로 등장한 유력한 농민과 부유한 상인들이 불교를 선구적으로 수용하는 주체세력이 되었다. 이런 지방 재지세력 가운데서도 특히 북방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상의 요지인 선산과 영주 같은 지역 출신들이 가장 유력한 존재로 부각될 수가 있었다. 이들 재지세력가들은 인도에서 기원전 6~5세기 농촌사회의 신흥세력으로 등장하는 가하빠띠(gahapati, 또는 grihapati)에 비견되는데, 인도에서는 이들이 석존 당시 불교교단의 후원자로서 불교전적에 자주 등장하는 부유한 집안의 가장들이었다.

한편 17대 내물마립간부터 21대 소지마립간까지, 이른바 연맹왕국 시기의 지배체제는 6부공동의 운영체제였다. 6부는 각각 독자적인 정치체제로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며, 각부의 대표가 참여하는 회의체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등 6부공동으로 운영하였다. 그런데 22대 지증왕(500~514)이 즉위한 이후 그러한 6부 공동의 지배체제는 변모해서 6부 가운데 탁부와 사탁부의 세력이 특히 강력해지면서 2부 주도의 체제로 바뀌는 한편, 각부의 단위 정치체로서의 독자성은 크게 약화되면서 왕경의 행정구획으로 바뀌어 갔다. 그에 반비례하여 국왕의 권력과 위상은 높게 강화되어 갔다. 지증왕 즉위 4년(503) 10월 국호를 ‘신라(新羅)’, 왕호를 중국식 ‘왕(王)’으로 확정하고 국왕 이외 6부 대표들은 아무도 왕을 칭하지 못하게 하였다. 지증왕 4년 9월25일 수립된 ‘영일 냉수리비’에 의하면 6부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을 ‘7왕(七王)’으로 표기한 바와 같이 6부대표들이 각기 왕으로 칭해지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한 달 사이에 왕권의 강화라는 점에서 커다란 변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3년(502)에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5년(504)에는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여 전통적 장례의식을 혁파하였다. 그리고 6년(505)에는 주군제(州郡制)를 시행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왕권의 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는 다음대의 23대 법흥왕대(514~540)에 더욱 가속화되어 먼저 4년(517) 중앙행정관부로서는 최초로 병부(兵部)를 설치하였다. 원래 6부는 독립적인 정치단위로서 각각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6부가 독립적인 정치단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함에 따라 6부의 군대도 통합되어 국왕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것을 통할하는 관부로서 병부가 가장 앞서 설치된 것이다. 법흥왕은 병부 설치를 통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이어 7년(520) 드디어 국가체제 정비와 왕권강화의 근간이 되는 율령(律令)과 백관의 공복제(公服制)를 반포할 수 있었다. 이로써 관등과 관직의 제도가 정비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으며, 6부는 정치적 위상과 기능을 상실하고 왕경의 단순한 행정구획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한 다음해(521) 중국 남조 왕조인 양(梁)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비록 동맹국인 백제의 사신에 딸려 보낸 것이기는 하였지만, 보살황제로 칭해지던 양의 무제(梁武帝)가 그 답례로서 승려인 원표(元表)를 사신으로 파견해 옴으로써 불교의 공인 문제를 공론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9년(522)에는 대가야 왕실과 정략적인 결혼을 통하여 낙동강 서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트는 한편, 19년(532) 금관가야를 병합하였고, 12년(525) 사벌주(沙伐州, 상주)에 군주를 파견하여 소백산맥 이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법흥왕대 전반기의 정력적인 체제정비와 왕권강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6부체제의 전통은 강인하게 이어지면서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법흥왕 11년(524)에 수립된 ‘울진 봉평비’에서는 탁부 소속의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과 사탁부 소속의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 그리고 이밖의 탁부・사탁부・잠탁부・본피부 등 4부의 대표 및 11등 나마 이상의 관등을 소지한 관료 등 14인이 모여 회의를 하고 그 결정된 사항을 공동의 명의로 실시케 하였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율령 반포 이전의 ‘영일 냉수리비’의 7왕(王)회의에 비하면 14인회의 참석자의 열거 순서에서 소속한 부보다 소유한 관등을 우선하는 것으로 바뀌기는 하였지만, 6부공동운영의 기본적인 체제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6부체제의 전통을 이은 귀족회의는 법흥왕 14년(527) 불교 공인문제로 파란을 겪게 되었다. 불교 공인을 추진하는 왕권과 반대하는 귀족세력으로 분열된 끝에 마침내 사찰공사의 책임을 지워 왕의 측근인 이차돈(異次頓)을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이차돈은 ‘삼국사기’에는 근신(近臣), ‘삼국유사’에는 사인(舍人)으로 표기되었는데, 법흥왕의 가신(家臣), 또는 집사(執事)의 역할을 맡은 측근 인물이었다. 이차돈 같은 측근 관료들은 뒷날 왕권강화에 비례하여 권력이 강화되어 갔으며, 마침내 사적으로는 왕실관리를 담당하는 내성사신, 공적으로는 중앙행정관서를 통솔하는 집사부중시로 나뉘어 왕권을 뒷받침하는 두개의 축이 되었다.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공인은 일단 좌절된 것으로 보이지만, 16년(529)년 살생을 금지하는 영을 내린 것을 보면 이차돈 사후 오래지 않은 시기에 공인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불교공인은 왕권강화와 맞물린 문제라는 점을 고려할 때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18년(531)의 상대등(上大等) 설치였다. 이제 국왕은 6부체제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지위로 상승하고, 6부회의를 주재하는 의장의 역할은 상대등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왕은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의 대왕(大王)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왕을 칭하게 된 배경에는 불교 승려들의 역할이 있었다. ‘울주 천전리서석’의 다음 구절은 그것을 웅변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갑인년에 대왕사(大王寺)의 안장(安藏)이 짓다.”(갑인명)
“을묘년 8월4일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때에 도인(道人) 비구승 안급이(安及以)와 사미승 수내지(首乃至), 거지벌촌(居智伐村)의 중사(衆士) □인(人)들이 (서석곡을) 보고 짓다.”(을묘명)

위 문장 중 갑인년은 법흥왕 21년(534), 을묘년은 법흥왕 22년(535)으로써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최초사찰인 흥륜사 창건공사는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로 인해 일시 중단되었다가 법흥왕 22년(535)에 재개하여 다음왕인 진흥왕 5년(544)에 준공하였다. 그리고 새로 창건하는 사찰을 대왕사라고 한 것은 왕 중의 왕인 대왕, 곧 법흥왕이 세운 사찰이라는 뜻이고, 성법흥대왕이라 한 것은 성스러운 불법을 일으킨 대왕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대왕사와 성법흥왕을 칭하는 구절에 모두 승려들만이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명칭을 부여한 장본인이 바로 승려였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법흥왕의 왕호가 11년(524) ‘울진 봉평비’에서의 “모즉지매금왕(모진마립간)”에서 22년(535) ‘천전리서석’에서의 “성법흥대왕”으로 바뀐 것은 국왕의 위상이 격단으로 상승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흥왕은 그러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23년(536) 마침내 새로 연호를 세운다는 의미의 “건원(建元)”의 원년(元年)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상대등의 설치 등의 일련의 정치개혁과 불교의 공인, 흥륜사의 창건, 성법흥대왕의 왕호 사용, 건원원년의 선언 등 일련의 종교적 사상적 개혁은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의 관계가 일체화된 것이었음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53호 / 2020년 9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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