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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와 불법의 파수공행(把手共行)

현대의 의사는 생로병사를 관장하는 절대적 존재다. 죽음은 의사의 판정이 있어야 공식적으로 승인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는 종교의 관할이었다. 의업이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승의(僧醫) 혹은 의승(醫僧)이 대표적이다. 궁중이든 민간이든 불법(佛法)에 기반, 주력이나 한의적인 처방으로 치병하는 기록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불교의술을 포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지만, 정신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눈앞의 육체적인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자비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익을 염두에 둔 의술이 아니었다.

유교 철학을 기반으로 의술을 베푸는 유의(儒醫)도 마찬가지다. 16세기 중국의 이천(李梴)이 펴낸 ‘의학입문’의 말미에 의료인의 공부 자세나 윤리를 기록한 ‘습의규격(習醫規格)’에서는 “만약 환자가 가난한 사람이면 대가를 조금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더욱 어질고 청렴할 것이다. 대개는 사람이 갚지 못하면 하늘이 반드시 갚는다”고 한다. 이를 측은지심을 실천하는 인술(仁術)이라고 한다. 의술은 상업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의사들의 파업을 두고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환자를 볼모로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자는 것인가, 소방관이나 경찰이 자신의 정원을 늘이거나 줄여달라고 하는 것을 보았는가, ‘전교1등’만이 이 사회의 기득권이 될 수 있는가. 문제의 본질은 의료의 자본화에 있다. 전통적으로 의술이 돈과 무관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의사는 종교적 세계관과 깊은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처님 스스로 의왕이라고 하신 것은 인간의 영육 전체를 통찰하셨기 때문이다.

한국의 의료체계는 미국 방식이 지배적이다. 해방 후 미국 의료가 선진적이었다고 보고 무비판적으로 도입했다. 그러나 지금 목격하는 것처럼 미국의 의료 현실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음을 판단할 수 있다. 의술의 철학이 내면에 있었기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과 같은 시대의 의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 평생 공공의료를 서원하고 일관된 길을 걸어온 그 힘이 한국 사회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있다. 깨어있는 한 사람만이라도 있으면 그 사회에 희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의료인이 시민 건강을 위해 사회 모든 분야에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로나 댐의 건설, 공장부지 선정을 한다고 할 때, 시민 건강에 어떤 위해가 있는지 먼저 의료계의 소견을 듣고 판단하는 것을 제1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 뒤에 숨죽이고 있는 인간의 건강권을 의료인들이 보호해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나아가 의사는 이 사회가 건강할 때 가장 많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어차피 의사도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 방식이 병의 발생건수가 아니라 이 사회를 병들지 않게 한 그 전문적 노력에 대한 대가여야 한다. 

13세기 장자화(張子和)가 지은 종합의술서인 ‘유문사친(儒門事親)’에는 “상의(上醫)는 나라를 다스리고, 하의(下醫)는 사람을 치료한다”고 하여 옛날부터 의술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유럽에서 공장 노동자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산업 의료처럼 때로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메스를 들이대는 의료가 되어야 한다. 지난해 과로와 사고로 2000여명의 근로자가 죽었다. 한없이 슬프다. 사회적 병근은 놔두고 병만을 치료한다면 정의로운 의료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의 의료계는 점점 자본에 지배되고 있다. 돈 되는 제1의 직업이 의사임을 아이들도 안다. 의사들의 파업은 근본을 벗어났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 내부의 고통을 묵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직업으로서의 윤리 맨 앞에 이익을 놓은 그 자세에 시민들은 실망한다. 점점 짧아지는 대면진료시간, 내용도 모르는 갖가지 처방들, 공공의료 반대 등은 전형적인 자본의 방식이다. 대승불교의 가치인 성불제중, 제생의세(濟生醫世), 깨달음과 자비가 의술의 궁극적 목표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사들은 알고 있을까.

원영상 원광대원불교학과 교수 wonyosa@naver.com

 

[1554호 / 2020년 9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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