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 거짓일 수 있어야 참일 수도 있다

견해 주장하려면 스스로를 비판에 노출시켜야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옳을 수 있으려면 틀릴 가능성 커야
뉴턴·아인슈타인 과학이론은 거짓으로 드러나기 쉬운 체계
“깨친 경험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등도 비판 노출 필요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고대 그리스의 한 왕이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려고 신탁으로 유명한 델피에 가서 사제들에게 물었다. “이번에 전쟁을 하면 누가 이기는가?” 사제들이 답했다. “강한 자가 승리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단숨에 페르시아로 진격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분노한 왕은 다시 델피로 가 사제들에게 신탁이 틀렸다고 따졌다. 그러자 사제들은 “페르시아가 강한 자였으니 신탁은 옳았습니다”라고 대꾸했다. 만약 그리스 왕이 이겼으면 “역시 저희들이 받은 신탁이 옳았습니다”라며 예언적중 보너스를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엉터리 예언은 언제나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에 옳을 수밖에 없다. 결코 거짓일 수 없다.

한국에도 운명철학관에 가면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너는 내년에 동쪽에서 온 귀인을 만난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한 번만 생각해도 엉터리임이 드러난다. ‘귀인’이란 어떤 이를 의미할까? 해석하기 나름이다. 아무나 귀인이 될 수 있다. ‘동쪽에서 온 사람’은 누구일까? 지구는 둥그니까 동쪽으로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사람이 모두 동쪽에 있는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만나는 아무나 동쪽에서 온 귀인이 될 수 있다. 점성술 같은 술수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써서 언제나 옳다고 풀이될 여지를 남겨둔다. 그것들은 실제로 아무 새로운 정보내용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으로 드러날 수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17세기 뉴턴의 과학은 거짓으로 드러나기 쉬운 체계로 만들어졌다. 그는 언어 가운데 가장 분명하고 정교한 언어인 수학으로 자연의 법칙을 표현했다.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며 등식으로 우주의 움직임과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했기 때문에 실험과 관측결과에 의해 그의 이론이 거짓으로 판명될 확률은 높았다. 그렇지만 20세기 초까지 250여 년 동안 그의 이론은 반증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뉴턴의 물리학은 인류사회에 지대하게 공헌했다. 거짓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던 그의 물리학이 만든 결과다.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옳을 수 있으려면 틀릴 가능성이 커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20세기 철학자 칼 포퍼의 과학철학을 내 방식으로 풀어 본 것이다. 그는 점성술뿐 아니라 공산주의 또한 거짓일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결코 과학일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사회철학도 내 방식으로 해석해 보겠다. 스스로를 과학이라 칭하는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으로 본다. ‘계급투쟁’ 또한 너무나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있는 두루뭉술한 비과학적 표현이지만, 이 문제는 위에서 다루었으니까 편의상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다. 내가 지적하려는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예측에 어긋나거나 반대되는 증거가 나오면 언제나 임시방편적 가설(ad hoc hypothesis)을 끌어들여 빠져나가려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점이다.

과학적(?) 공산주의를 내세운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그 자체의 모순 때문에 그의 생존 시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사후 추종자들은 이런 저런 방편적 가설을 끌어들여 이론적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영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개척하여 착취함으로써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도 지탱하고 있다고 변명했다. 그래도 내재한 모순으로 말미암아 곧 붕괴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런 붕괴는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다시금 틀렸다. 그랬더니 이들은 또 자본주의 국가들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일으켜 물자와 인력을 소모시킴으로써 그 경제 체제를 계속 유지했다며 자본주의의 사악함(?)을 더 부각시키는 가설을 도입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세계 대전이 끝나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2차 대전 후에는 대부분의 식민지도 독립했으니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망하기는커녕 나날이 번성해 갔다. 그랬더니 또 공산주의자들은 미국 등의 다국적 기업이 전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지속된다는 가설을 새로 도입했다. 이렇게 한 세기 반에 걸쳐 궁색한 가설들을 도입하며 공산주의를 지키고 자본주의 붕괴를 선동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붕괴였다. 지금까지 지적되어 온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아직도 건재하다.

포퍼가 보여준 과학의 특성은 ‘스스로를 비판에 노출시켜 반증 사례가 나오면 기꺼이 기존 이론을 폐기하는 열린 태도’이다. 그는 아인슈타인을 예로 들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 이론이 옳다면 빛이 태양과 같이 거대한 중력을 가진 물체를 지나갈 때 중력에 의해 진행방향이 휘게 될 것이라면서, 그 예측이 틀리다면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그 후 인도에서 볼 수 있었던 일식 때 관측한 결과에 의하면 알려진 두 별 사이 거리가 원래 거리보다 더 멀게 관측됨으로써 빛이 태양의 중력으로 휘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뉴턴의 역학으로는 설명도 예측도 할 수 없던 현상이어서 당시의 상식으로는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틀릴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적 관측에 의해 그의 주장이 옳은 이론으로서 과학계 전체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자연이나 인간사회 그리고 역사에 대한 견해를 주장하려면 먼저, 과학과 같이, 그 주장 내용이 풍부하고 표현은 명료해야 하며 스스로를 비판에 노출시켜 반증사례가 나오면 주장을 기꺼이 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성술이나 공산주의 그리고 정신분석학은 이 가운데 그 어느 요건도 충족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원칙적으로 거짓임이 밝혀질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참된 학문이 될 수도 없다.

내가 이번 글에서 과학철학의 통찰을 소개한 이유는 그것을 독자들과 함께 한국불교계의 가르침에도 적용해 보기 원하기 때문이다. “깨친 자만이 그 맛을 안다” “깨친 경험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오직 깨친 자만이 깨친 자를 알아본다”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깨침’에 대한 분명한 정의(定義)를 가져본 적이 있나? 그래서 깨침에 대한 분명하고 명료한 표현방식이 존재한 적이 있나? 이런 가르침에 어떤 풍부한 내용이 있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비판에 노출시킬 의향이 있나? 이런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원칙적으로라도 있나? 독자께서 스스로 이 질문들에 답해 보시기 바란다, 과학철학은 ‘거짓일 수 없는 주장은 참일 수도 없다’고 판단한다는 점을 상기하시면서.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54호 / 2020년 9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