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제35칙 경청유언(鏡清有言)
36. 제35칙 경청유언(鏡清有言)
  • 김호귀 교수
  • 승인 2020.09.27 13:59
  • 호수 1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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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게 태어났다 헛되게 죽은 놈

처음부터 질문 모두 부정한 설봉
질문 끌려다니지 않기 위한 설법
이론·사상·명분 통해 문답 초월
가장 진지한 자신만의 답변 요구

경청도부가 설봉의존에게 물었다. “고인은 말했습니다. …” 그러자 설봉이 벌러덩 그 자리에 누워버리더니 양구(良久)하고 일어나서 말했다. “뭐라고 물었던가.” 경청이 다시 묻자, 설봉이 말했다. “헛되게 태어났다가 헛되게 죽은 놈이로다.”

문답에서 설봉이 벌러덩 누워버린 까닭은 아예 처음부터 분별의 끄나풀을 제공할만한 질문을 깡그리 부정해버린 모습이다. 질문을 하고 있는 자체에는 그에 상응하는 답변이 무엇일까 하는 계산이 깔려 있다. 때문에 분별에 대한 입막음을 미리 해둠으로써 이후에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어떻게 답변으로 제시하더라도 더 이상 질문에 끌려가지 않게 된다. 설봉은 평소에 다음과 같은 설법을 자주 하였다.

“내가 만약 동쪽은 이렇다고 말하고 서쪽은 저렇다고 말하면 그대들은 그 언설과 구절만 따라서 그 가운데서 나름대로 이러쿵저러쿵 답변을 찾아내어 동쪽이 어떻고 서쪽이 어떻고 왈가왈부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영양이 뿔을 나뭇가지에 걸치고 잠을 잔다는 말을 꺼내는 경우에는 그대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지하여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볼 것인가.”

여기에서 동쪽과 서쪽은 가장 상식적인 문답으로써 누구라도 답변이 가능한 일상적인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와 같이 이론과 사상과 명분이 통하는 문답을 초월하여 납자들로 하여금 가장 진지한 자신만의 답변을 말해보라는 것이다. 영양은 대단히 용의주도하여 밤에 뿔을 높은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잠을 잔다는 의미이다. 맹수로부터 공격을 받은 빌미를 조금도 내보이지 않는 작략으로 영리한 납자의 선기를 상징한다.

설봉은 승이 찾아오는 모습만 보고도 벌써 그의 역량이 어떤가를 감변(勘辨)하여 질문하는 말에 대하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그래서 벌러덩 누워버렸지만 양구하고 다시 일어난 행위는 질문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친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좀 더 친절한 태도로 대응해준 제스처였다. 이에 노파가 친절한 자세로 다시 질문하라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 똑같은 답변을 하자 설봉은 더 이상 자비만 베풀어 줘서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냉철하고 따끔하게 일깨워주는 말로 응답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그대의 본분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한 벌칙이었다. 그러한 선기를 가지고 누구에게 덤벼들었다가는 일생을 허비한 것에 그치지 않고 태어난 자체부터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해주었다.

문답에서 언급한 양구(良久)는 대화하는 도중에 잠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 침묵에는 어떤 말보다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질문한 승은 마치 하급관리가 대부분 규정을 따지는 것처럼 현재를 가지고 옛날을 비추어보고 있는 모양새다. 스스로 판단하거나 결단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상황이 끝나기만 기다렸다가 제일 안전하다고 간주되는 편에 서려는 것이다. 때문에 설봉이 갑자기 벌러덩 누워버리는 태도를 보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다만 시간을 기다리면서 질문할 단서를 기다라고만 있었던 자세가 바로 그 증거다.

설봉노장은 찾아온 납자의 얼굴 표정만 보고도 금방 그 사람의 전부를 알아차리는 까닭에 굳이 몸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없다. 그런데 승은 단지 설봉의 입이 거친 줄로만 알고 있을 뿐이지 언설 가운데 담겨 있는 속뜻을 눈꼽만치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다시 설봉이 다그치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거듭하여 조금 전과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여 말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마치 수풀 속을 더듬어서 참새를 찾아내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꼴이기 때문에 그런 깜냥으로 어찌 설봉이 양구한 의도를 알아차릴 수가 있겠는가. 또한 승은 그와 같은 어설픈 선기(禪機)로 어찌 설봉의 찬탄의 긍정과 벌칙의 꾸지람을 배울 수 있었겠는가. 그런 까닭에 설봉으로부터 헛되게 태어났다가 헛되게 죽은 놈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55호 / 2020년 9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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