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55) 결론 -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⑨ - (3) ‘중고’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 중
85.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55) 결론 -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⑨ - (3) ‘중고’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 중
  • 최병헌 교수
  • 승인 2020.09.27 16:55
  • 호수 15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라 왕실이 인도 부처님 혈족처럼 신성한 혈통이라는 진종설 대두

진흥왕, 황룡사 지어 흥륜사와 더불어 과거불 미래불 신앙 갖춰
진평왕의 가족 이름 모두 인도 석가왕실 가족 이름 그대로 차용
진흥왕은 전륜성왕, 진평왕은 제석신앙 수용 왕권강화 적극 활용
사적 180호 경주 진평왕릉.
사적 180호 경주 진평왕릉.

신라 ‘중고’시기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기틀을 마련한 23대 법흥왕(514~540)을 이어 왕권 강화와 지배체제 정비를 정력적으로 추진하여 3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한 것은 24대 진흥왕(540~576)과 26대 진평왕(579~632)이었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자로 그의 아버지는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立宗)갈문왕,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었다. 이러한 근친혼은 3촌 숙질 관계로써 권력을 다른 가문과 나누지 않으려는 정략결혼의 결과였다. 진흥왕 즉위 당시 7세의 어린 나이로 모후가 섭정을 맡고, 왕과 같은 탁부 출신의 이사부(異斯夫)가 병부령으로서 중외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왕을 보좌하였다. 진흥왕대 초기 10여 년간은 법흥왕대의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면서 정책을 계승하였다. 특히 진흥왕 5년(544) 2월 법흥왕이 착공했던 사찰을 준공,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명명하여 법흥왕의 사찰인 흥륜사라는 점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3월에 출가 승려가 되어 불교를 신봉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전왕의 불교흥륭정책을 계승하였다. 다음해인 진흥왕 6년(545) 이사부 건의에 따라 역시 탁부 출신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國史)’를 편찬케 한 것도 왕통의 전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정책일환이었다.

진흥왕 12년(551) 18세의 성년이 된 진흥왕은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고 새 정치를 모색하였다. 진흥왕은 우선 중앙 행정관서로서 병부령 1인을 증원하고, 사정부(司正部)와 품주(稟主)를 새로 설치하여 군사・사정・재정 등 시급한 분야를 정비하였고, 이어 3국 경쟁에 뛰어들어 군사조직의 정비와 신무기(砲弩)의 개발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영역확장 정책을 추진하여 마침내 한강유역과 낙동강 서쪽지역을 확보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진흥왕은 영역확장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22년(561)에는 창녕에 ‘척경비(拓境碑)’, 29년(568)에는 북한산・황초령・마운령 3곳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특히 포고령 성격의 ‘순수비’에서는 연호를 ‘대창(大昌)’으로 바꾸고 천명을 받은 제왕의 정통성을 과시하면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정치사상을 표방하였다.

한편 진흥왕은 왕권을 종교적으로 신성화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고구려 승려 혜량(惠亮)을 받아들여 최초로 국통(國統)이라는 승관을 설치하고, ‘황룡사(皇龍寺)’를 새로 창건함으로써 흥륜사를 대신하여 국가불교의 중심도량을 삼은 것이다. 특히 황룡사 창건공사는 진흥왕 14년(553)에 시작하여 27년(566)에 준공한 대역사였다. 원래 황룡사의 자리는 경주 분지의 정중앙지점에 위치하는데, 왕권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자연적인 구릉에 위치한 월성의 편재성을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왕궁자리로 선택된 곳이었다. 그러나 궁궐 공사 중에 황룡이 나타나는 이적으로 인하여 사찰의 창건으로 계획을 바꾸고 이름을 황룡사로 지었다는 창건연기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국도의 중앙지점에 궁궐보다는 사찰을 짓는 것이 왕권의 위상을 높이는데, 더 유효하고 시급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며, 늪지대였던 점이 황룡을 등장시키는 이적 설화를 남기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35년(574) 에는 황룡사에 장륙존상을 조성하였는데, 구리의 무게가 35,007근, 도금한 금의 무게가 10,198푼의 장대한 불상이었다. 이로써 미륵불을 본존으로 하는 법흥왕의 흥륜사와 석가불을 본존으로 하는 진흥왕의 황룡사가 새로 완성됨으로써 미래불인 미륵불과 과거불인 석가불의 두 부처에 대한 신앙이 온전히 갖추어지게 되었다. 황룡사의 조성 경위에 대해 ‘삼국유사’ 황룡사장륙조에 연기설화의 형태로 전해주고 있는데, 서쪽 불교 나라인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육왕(阿育王,Aśoka)에 견주는 위대한 제왕으로서의 자부심이 반영된 것이며, 동시에 영역확장과 불교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달성한 진흥왕의 고양된 정치의식 소산인 것이다. 진흥왕은 거대한 불상을 조성한 공덕으로 아육왕 같은 위대한 제왕이 되기를 기대했고, 또한 새로 조성된 장륙존상 앞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rājan) 같은 위대한 제왕이 되어달라는 염원을 빌었을 것이다. 이러한 염원은 아들들에 대한 기대로 표출됐는데 동륜(銅輪)・사륜(舍輪,혹은金輪)・은륜(銀輪,화랑세기?) 등의 아들과 딸들의 이름이 바로 4종의 전륜성왕에 대응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륙존상의 조성에 앞서 진흥왕 27년(566) 장자 동륜을 태자로 책봉하였고, 33년(572) 정월 연호를 ‘홍제(鴻濟)’로 바꾸어 널리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불교정치이념을 표방하였음에도, 그해 3월 동륜태자가 사망함으로써 아들에 걸었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중고’ 시기 유일하게 생전에 태자를 책봉하여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추구했던 계획은 실패하였고, 대신 둘째 아들인 사륜이 왕위를 이어 25대 진지왕(576~579)이 되었다. 진지왕은 탁부 출신의 상대등 거칠부의 보좌를 받았으나, 거칠부가 곧 사망하였고, 둘째라는 정통성의 약점과 실정(失政)으로 인해 즉위 4년 귀족회의에 의해 폐위되고 말았다.

진지왕대의 혼란을 수습해 다시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크게 발전시킨 왕은 26대 진평왕(579~632)이었다. 진평왕은 54년 동안 재위하면서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신성을 결합한 고대제왕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데 성공하여 ‘중고’시기를 대표하는 국왕으로 평가되었다. 진평왕의 아버지는 동륜태자, 어머니는 입종갈문왕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으로서 진흥왕의 부모와 같이 3촌 숙질 사이의 근친혼이었으며, 역시 진흥왕과 같이 탁부와 사탁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던 점이 왕권 안정에 크게 작용하였다. 진평왕의 본명은 백정(白淨), 부인은 복승(福勝)갈문왕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었다. 그리고 즉위한 직후 친동생인 백반(伯飯)은 진정(眞正)갈문왕, 국반(國飯)은 진안(眞安)갈문왕으로 책봉하여 왕실의 위상을 높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진평왕의 가족 이름이 모두 인도 석가왕실 가족들의 이름에서 그대로 따왔다는 점이다. 석가의 부모인 백정(白淨,또는淨飯,Śuddhodana)과 마야(摩耶,Māyā), 석가의 형제인 백반(白飯,Śuklodana)과 곡반(斛叛,Droņodana) 등에 그대로 대응되는 것이다. 진평왕 직계 가족이 인도의 석가 가족과 같은 성스러운 혈통이라는 진종설(眞宗說, 刹帝利宗說)을 주장한 것은 고대 제왕의 신성을 불교적으로 수식하는 나름의 하나의 방편이었다.

진평왕은 즉위 직후 귀족세력을 포섭하여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였는데, 원년(579)에는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 2년(580)에는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보좌케 하였다. 그리고 3년(581)부터 중앙 행정관서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전반기에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 공부(貢賦)를 맡은 조부(調府), 의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예부(禮部), 수륙의 운송을 담당하는 선부(船府)와 승부(乘府), 외국사신의 접대를 맡은 영객부(領客府) 등 상급 관서들을 설치하였다. 즉위 후반기에는 왕실을 강화하기 위한 기구로 내성(內省)과 시위부(侍衛府)를 설치하였다.

특히 진평왕 44년(622) 내성을 설치하고 사촌 동생 용수(龍樹)를 사신(私臣)으로 임명하여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세 궁을 통합 관리케 한 것은 왕권의 실제적 강화를 뒷받침하는 획기적 조치였다. 22대 지증왕 이후 6부체제가 변화되면서 탁부(뒤의 양부)와 사탁부(뒤의 사량부) 2부가 주도하는 체제로 바뀌어 갔는데, 법흥왕 18년(531) 상대등이 설치되어 국왕은 6부체제를 벗어나 초월적인 지위로 상승하였으나, 국왕의 실제적 권력기반은 여전히 탁부와 사탁부의 세력이었다. 금석문과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2부(部) 소속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흥왕과 진평왕 부모대의 근친혼도 실은 2부 결합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국왕과 2부의 관계를 1차 제도적으로 정리한 것이 진평왕 7년(595) 대궁・양궁・사량궁에 각기 사신(私臣)을 두어 관리케 하였던 것이고, 2차 정비한 것이 44년(622) 다시 3궁을 통합하여 관리케 한 것이다.

이로써 3궁 곧 왕실과 양부・사량부는 국왕 중심으로 완전히 통합된 것이고, 그 통합 관리를 맡은 사신으로 용수를 임명한 것은 정치권력의 핵심인물로 등장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용수는 진평왕과 사촌 형제 사이로 측근으로 활약해온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진평왕의 둘째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과 결혼함으로써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또한 왕실과 궁궐의 관리책임자를 사신이라고 칭한 것은 귀족회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상신(上臣)이라고 한 칭호에 대조되는 것으로써 사신과 상대등은 각기 왕실과 귀족을 대표하며, 다음 대에 설치되는 행정관서를 통솔하는 집사부 중시와 함께 권력의 3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진평왕대 대내적으로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고 지배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던 것은 대외적으로 고구려・백제와의 관계가 소강상태를 이루게 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고구려는 중국대륙이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세력으로 등장하는 수・당의 제국에 대한 대비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백제는 성왕의 피살 이후 왕권 안정과 지배체제 정비에 상당기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경지대의 소규모 충돌은 일어났으나, 대규모의 전쟁은 없었다. 진평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수・당과 친선외교를 강화하고, 중국문화, 특히 불교를 수입하는 노력을 경주하여 뒷날 불교발전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왕권을 종교적으로 신성화하는데 성공하였다.

진평왕이 왕권신성화에 불교를 활용했음은 이미 앞에서 직계 가족의 이름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그밖에 진평왕의 불교신앙에 관련된 사실로는 ‘삼국유사’ 권2 천사옥대조에 2종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부동석(不動石)의 설화이다. 진평왕이 내제석궁(內帝釋宮,또는 天柱寺)에 행차하여 돌계단을 밟으니, 돌 3개가 한꺼번에 부러져서 부동석으로 전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둘째는 천대옥대(天賜玉帶) 설화로 진평왕이 종묘(神宮)의 제사 때에 착용했다는 허리띠가 즉위년에 상황(上皇)이 천사(天使)를 통해 내려준 것이라는 내용이다. 원시적인 관념형태로써 진평왕의 위대성을 나타내주는 신체적 특징이 장대하였다는 점을 들면서 부동석과 옥대를 증거물로 제시하는 설화인데, 불교의 제석신앙(帝釋信仰)과 관련시킨 점이 특히 주목된다. 제석은 인도의 고대신화에 등장하는 인드라(Indra)신을 가리키는데, 불교에 수용되어 수미산 도리천의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면서 사방을 수호함과 아울러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이 되었다. 진평왕대 이미 제석신앙을 수용하여 왕궁 안에 내제석궁(또는 천주사)을 설치하고 왕권강화에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55호 / 2020년 9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