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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일본의 사리신앙 ③ - 사리장엄 봉안에 보이는 사리신앙, 그리고 헤이안 시대의 사리신앙 혁명

사리친견법회에 황제 참여 정착되며 크게 발전

백제‧신라 사리장엄 영향 받아 아스카 시대 사리신앙 시작
나라 시대엔 불사리 담은 탑 법당 안에 두고 수시로 친견
헤이안 시대, 불사리‧경전 함께 봉안하는 새로운 형식 등장

호류지(法隆寺) 오층 목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 일본에서 가장 이른 시대의 사리장엄 중 하나로, 백제의 영향을 받아 심초석에 사리장엄을 안치하는 방식을 따랐다.

사리를 담은 사리기(舍利器)와 그것을 꾸미기 위한 물품들을 통틀어 사리장엄(莊嚴)이라 한다. 미술이나 문화 그리고 신앙에는 나라마다 다른 민족성이 나타나곤 하는데, 사리장엄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사리장엄은 엄숙미가 강조되었고, 중국은 웅장함, 일본은 화려번화, 우리나라는 절제된 화사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사리장엄에는 기본적으로 불사리를 경배하는 마음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장엄하면 불사리의 위의(威儀)에 합당한 장엄이 될까 하는 고민이 배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탑(古塔)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에서 아름다운 조형(造形)만이 아니라 당시 사리신앙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옛날의 사리장엄을 바라보는 시선은 거의 사리기의 미술적 양식에 집중되어 있지만, 옛날 사람들의 사리신앙도 같이 이해해보려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일본에서 사리신앙이 시작된 아스카 시대(7세기 전반)에는 백제•신라의 사리장엄 방식이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 588년 이후 불탑 건축전문가들을 보내어 일본에 사리신앙이 활발히 일어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던 백제, 623년에 불사리를 전해주었던 신라 등 우리나라 삼국이 일본 사리신앙의 초석을 놓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목탑의 사리장엄은 대체로 기단부 중앙에 놓이는 기둥 돌인 심초석에 사리장엄이 마련된다. 일찍이 6세기 초반 백제 목탑 사리장엄에서 확인되는 방식이다. 예컨대 익산 제석사지 목탑, 미륵사지 서탑이 바로 그렇다. 일본에서 가장 이른 시대에 세워진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오층 목탑이 이 같은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 같다.

소후쿠지(崇福寺) 목탑 사리장엄. 7세기 사리장엄으로, 상자형 사리함 기단부의 투각 기법, 유리사리병 등 불국사 사리장엄과 흡사하다.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사리장엄의 상자형 사리함.

호류지 목탑은 1952년 발굴조사 때 기단에서 지하 2.7미터 아래 심초석의 중앙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장엄이 확인되었다. 조사 이후 제자리에 다시 넣어져 지금은 그 실물을 볼 수 없지만, 조사보고서와 촬영된 사진으로 볼 때 백제와 신라 사리기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커다란 놋쇠 사발 접시 안에 은제 사리기, 금제 사리기를 차례대로 포개 넣고, 그 안에 불사리를 담은 목이 긴 녹색 유리병을 안치했다. 이런 수법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사리장엄 형식과 거의 같다. 시대는 조금 뒤이지만, 신라의 불국사 석가탑 사리장엄 및 남원의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과 아주 흡사해 고대에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정황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일본 고대 사리기 중 최고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7세기 후반의 사가(滋賀) 소후쿠지(崇福寺) 목탑, 나라 야마타데라(山田寺) 목탑지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의 봉안 형식도 이와 비슷하다. 특히 소후쿠지의 경우, 상자형 사리함(舍利函)과 그 기단부에 장식된 안상(眼象) 투각(透刻) 기법, 그리고 목이 짧고 몸체가 두툼한 녹색사리병의 형태는 불국사 사리장엄의 상자형 사리함 및 녹색사리병의 모습과 아주 비슷해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알 수 있다.

아스카 시대와 달리 뒤이은 나라 시대(8세기)에서는 불사리를 야외의 탑이 아니라 작은 탑에 넣고 법당 안에 두는 방식이 나타났다. 도다이지(東大寺) 대불상을 점안(點眼)했다고 알려진 인도 스님 바라몬쇼조(波羅門僧正, 704~760)가 불사리 2000과를 가지고 와 천황에게 바치자, 천황이 전국의 사찰에 이 불사리들을 골고루 나누어 봉안하도록 함으로써 이런 방식이 유행했다고 한다(‘元興寺小塔院師資次第略記’). 그 실례가 나라 시대의 유일한 목탑으로 현재 국보로 지정된 간코지(元興寺) 오층 목탑이다. 높이 5.5미터의 이 목탑에 불사리를 봉안하고 법당 안에 두고서 수시로 친견했던 것이다.

일본의 사리장엄은 헤이안 시대(9~12세기)로 내려와 사리봉안 방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사리기의 모양이 한층 화려해졌다. 그렇게 된 배경은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겠는데, ‘후칠일어수법(後七日御修法, 고시찌니찌노미시호)’이라는 행사가 법제화된 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후칠일어수법은 매년 정월 8일부터 15일까지 7일 동안 궁 안의 법당 진언원(眞言院)에서 열었던 불사리 친견 법회인데, 지난 회에서 말했던 구카이(空海) 스님이 834년에 건의하여 실시되었다. 명칭은 일본에서 예로부터 정월 초하루부터 7일까지 ‘전(前)칠일’, 8일부터 15일까지 ‘후칠일’이라 한 데서 유래한다. 불은(佛恩)을 빌어 한 해 동안 나라가 평안하고 황실이 번성하며 오곡이 풍성하기를 기원하는 법회였다. 고기록에 이 법당 내부의 장엄이 묘사되어 있는데, 동벽에 태장계만다라, 서벽에 금강계만다라 그림을 걸고, 불단 앞에 커다란 단을 마련한 다음 그 위에 각종 불구(佛具)와 더불어 불사리를 넣은 금동제 그릇을 올렸다. 또 법당 북쪽의 중앙에 5대존상, 서쪽에 공작명왕, 동쪽 벽에 12천(天) 그림을 걸었다고 한다(‘覺禪鈔, 가쿠젠쇼’). 불사리는 작은 용기 안에 넣어 중앙 단 위에 두었다. 이렇게 해서 언제든 불사리를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전 나라 시대까지는 탑 안에 두어 봉안식 이후에는 사리장엄과 불사리를 볼 수 없었지만, 이때부터 공개되어 행사 때마다 사람들이 친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나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불사리가 훨씬 많이 전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황제가 참여하는 공식행사가 되면서 사리신앙이 일대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일본에서는 이를 ‘사리신앙의 혁명’이라고까지 부른다. 사리장엄 역시 그런 영향을 받아 갖은 장엄을 베풀어 더욱 화려하게 제작되었을 것이다.

한편 헤이안 시대의 사리신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불사리와 법사리(法舍利)인 경전을 함께 봉안하는 새로운 형식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경전을 법사리라 하는데, 두루마리 경전의 양 끝을 고정하는 권축(卷軸)을 수정(水晶)이나 유리로 만들고 그 축두(軸頭)에 불사리를 담은 작은 사리기를 넣는 방식이다. 대표적 예로 나라 가스가와카미야(春日若宮)의 문수보살상에서 발견된 ‘반야경’이 있다.

신대현 능인대학원대학 불교학과 교수 buam0915@hanmail.net

 

[1555호 / 2020년 9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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