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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33·34대 총무원장 자승 스님 ①

‘소통·화합 통한 불교중흥’ 원력으로 50대에 총무원장 당선

19세 출가…군 제대 후 설악산 봉정암 올라 홀로 기도정진 진행
폭넓은 인간관계·탁월한 종무행정으로 일찌감치 총무원장 후보
33대 총무원장 선거서 모든 계파 아우르며 역대 최다득표 당선

‘소통과 화합’을 강조한 자승 스님은 총무원장 취임법회를 하루 앞둔 2009년 11월4일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해 유가족을 위로했다.
‘소통과 화합’을 강조한 자승 스님은 총무원장 취임법회를 하루 앞둔 2009년 11월4일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해 유가족을 위로했다.

현대조계종사에서 자승 스님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든든한 문중의 뒷배도 없이 50대에 총무원장에 선출됐고, 숱한 저항과 도전 속에서도 재임에 성공해 4년 임기를 두 번이나 꽉 채웠다. 1962년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청담, 의현 스님이 총무원장을 연임했지만, 4년 임기 두 번을 모두 채운 것은 자승 스님이 유일하다. 총무원장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상월선원 결사, 만행결사를 이끄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자승 스님은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19세 되던 해 “출가수행자로 살겠다”며 산문에 들었다. 1972년 해인사에서 지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4년 범어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자승 스님의 첫 은사는 조계종 3·9대 총무원장을 역임한 경산 스님이었다. 해인사 강원을 다니던 1973년 서울 총무원청사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다. 이때 받은 법명이 ‘자승(慈乘)’이었다.

은사와의 인연은 깊지도 오래가지도 못했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경산 스님은 상좌를 살뜰히 챙길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고, 자승 스님이 군에서 제대할 무렵 돌연 입적했다. 은사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음에도 첫 은사와 맺은 인연을 쉽게 저버리지 않았다. 1988년 정대 스님과 새롭게 사제의 연을 맺으면서도 첫 은사로부터 받은 법명을 버리지 않았고, 2009년 11월 총무원장에 취임한 뒤 제일 먼저 찾은 곳도 경산 스님의 부도가 세워진 서울 적조사였다.

행정승으로 정평 나있는 자승 스님은 수행에 있어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79년 겨울,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설악산 봉정암에서 홀로 기도정진을 진행했다. 군에서 물든 세간의 물을 빼고 다시 출가자 본연의 삶으로 돌아가겠다는 원력에서 비롯됐다. 당시 봉정암은 지붕에 함석을 얹은 인법당과 허름한 산신각, 작은 화장실이 전부였다. 한 번 눈이 내리면 사람의 키 높이까지 쌓이고 매서운 칼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겨울의 봉정암은 일단 들어서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설악이 만든 ‘무문관’과 다름없었다.

체감온도 영하 30~40도의 맹렬한 추위에도 새벽·오전·오후·저녁, 하루 4번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 그때마다 꼬박 2시간씩 하루 8시간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서서 목탁을 쳤다. 목탁 치는 손이 뻣뻣이 굳어 금방이라도 떨어져나갈 듯 했고, 서있기조차 힘들었지만 스님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답을 얻고자 스스로를 백척간두로 내몰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진 고된 정진은 설악에 봄이 찾아들면서 끝이 났다.

5개월여 간의 정진은 “내게 필요하지 않은 인연은 오지 않는다는 부처님 말씀처럼 화두를 들든, 포교를 하든, 불사를 하든 주어진 그때그때 인연에 정성을 다하겠다”는 발원으로 이어졌다. 자승 스님이 총무원장에서 물러나 인제 백담사 무문관을 거쳐 위례 상월선원에서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에 맞서 동안거 결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봉정암에서의 결기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

설악산을 내려온 스님은 다시 선방으로 향했다. 통도사, 동화사, 봉암사 등에서 가부좌를 틀고 진지하게 삶을 성찰했다. 그러나 세상은 젊은 비구가 산중에서 화두만 붙들고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퇴색한 전통불교 회복과 승단정화는 여전히 한국불교계가 풀어야할 과제였다. 스님은 1986년 통도사 보광선원에서의 안거를 끝으로 사판(事判)의 길에 들어섰다.

1986년 총무원 교무국장에 발탁된 이후 규정국장, 재무부장 등을 거치며 종무행정을 익혔고, 수원포교당·삼막사·연주암 주지 등을 거치며 가람수호와 대중포교에 매진했다. 1992년 10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돼 종단 정치무대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11대 중앙종회 사무처장, 12·13·14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폭넓은 인간관계와 종무행정에 대한 탁월한 이해는 자승 스님이 중앙정치무대의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14대 전반기 중앙종회의장을 거치면서 스님은 이미 유력한 차기 총무원장 후보로 거론됐다.

2009년 8월10일 181차 임시중앙종회에서 32대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조계종은 빠르게 선거분위기로 전환됐다. 자승 스님과 더불어 원로의원 종하·월서, 금산사 전 주지 도영,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등이 후보군으로 오르내렸다. 이 무렵 조계종 내부는 여야의 구도가 옅어진 상태였다. 보림회와 더불어 야권을 형성했던 금강회가 2008년 9월23일 종책모임 해체를 결정하면서 화엄·무차회로 흡수되거나 무소속 연대로 남았다.

이런 가운데 자승 스님을 후보로 내세운 화엄회가 무차회, 무소속 연대와 33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공조하기로 합의한 데 이어 야권인 보림회와도 협력하기로 뜻을 모았다. 무량회도 9월15일 이들과의 공조를 선언하면서 자승 스님은 일찌감치 대세를 굳혔다. 9월29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행된 자승 스님 후보추대법회에는 19개 교구본사주지와 60여명의 종회의원이 참석했다. 기울어진 판세를 확인한 경쟁후보들은 줄줄이 출마포기를 선언했다.

9월7일 가장 먼저 출마기자회견을 했던 종하 스님은 후보등록 하루 전인 10월11일 출마포기를 선언했고, 월서·도영 스님도 불출마를 결정했다. 마지막까지 출마여부를 고심하던 정념 스님도 10월14일 “아직은 역량과 덕이 부족함을 절감했다”(법보신문, 2009년 10월14일)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로써 자승 스님은 1994년 총무원장 선거제도가 도입된 이후 처음으로 종단 모든 계파의 추대로 당선되는 첫 총무원장을 목전에 뒀다. 다만 군소후보였던 각명·대우 스님이 후보로 등록하면서 33대 총무원장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10월22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진행된 33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자승 스님은 선거인단 320명 중 317명이 참여한 가운데 290표(91.48%)를 얻어 당선이 확정됐다. 자승 스님이 얻은 290표는 역대 최다 득표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날 스님은 문중과 교구를 떠나 많은 종도들이 지지와 성원을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면서 “한 모금의 물을 마실 때도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의 고사를 거울삼아 임기 내내 맡겨주신 큰 책무의 근본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종단 안팎에서 전임 총무원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은 총무원장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언론도 “세속 나이 60~70대였던 전임 총무원장이 종단의 큰 어른 같은 상징적인 존재였다면 50대 총무원장은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발로 뛰는 행정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연합뉴스, 2009년 10월22일자)고 큰 관심을 보였다.

자승 스님이 총무원장에 당선되면서 내세운 슬로건은 ‘소통과 화합을 통한 불교중흥’이었다. “조계종이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화합하지 못한 승가의 모습으로 종도와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줬고, 어렵게 쌓아올린 불교중흥의 기회도 스스로 놓쳤다”는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소통과 화합을 근간으로 한국불교 중흥의 기틀을 만들겠다”(법보신문, 2009년 10월12일)는 게 스님의 종단운영 계획이었다.

스님의 행보는 파격에 가까웠다. 총무원 집행부 구성도 여야를 막론하고 고르게 배분했다. 총무부장에 영담(보림회), 기획실장에 원담(무차회), 재무부장에 상운(무소속), 문화부장에 효탄(비구니), 사회부장에 혜경(무량회), 호법부장에 덕문(화엄회) 스님을 각각 임명했다. 종단의 모든 계파를 아우르는 ‘연합집행부’가 구성된 것은 33대 집행부가 처음이었다. 일부 부장의 월권논란으로 불협화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각 계파가 참여한 연합집행부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됐다.

자승 스님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11월4일 총무원장 취임식 하루 전날 한국사회의 갈등이 집약적으로 표출된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해 중재를 약속했고, 12월17일 종로지역의 이웃종교인들을 총무원으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2010년 1월30일~2월2일 평양을 방문해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으로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한 노력도 진행했다. ‘소통과 화합’을 앞세운 자승 스님의 광폭행보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2009년 12월30일 조계종의 중재로 용산참사의 책임공방을 벌이던 서울시와 대책위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듬해 1월29일에는 조계종과 태고종이 50여년 이어온 신촌 봉원사 소유권 갈등도 해결했다. ‘조·태 분규’의 상징과 같았던 신촌 봉원사 소유권 갈등을 풀어낸 것은 불교사적으로도 의미가 컸다.

자승 스님은 종단안정을 발판으로 숙원사업에도 착수했다. 스님은 2010년 1월12일 기자회견을 열어 33대 총무원 집행부 4년 운영계획을 담은 로드맵을 발표했다. 스님들이 노후에 안정적으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수행연금 지원, 스님들의 사후 사유재산을 종단에 귀속시키는 종법개정, 주지인사고과제 도입, 승가교육진흥위원회 발족, 한국불교수행법 대중화, 해외특별교구 설립 등을 약속했다. 이날 발표된 33대 집행부 로드맵은 침체된 한국불교를 일신할 수 있는 대대적인 혁신안들이었다. 33대 집행부는 로드맵에 따라 착실히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해 3월 ‘강남 봉은사 직영전환 사태’가 발생하면서 자승 스님의 의욕적인 행보에도 제동이 걸렸다. 총무원은 3월9일 “특별분담사찰인 봉은사를 서울 강남권의 포교중심 사찰로 만들겠다”며 직영사찰로 전환키로 하고, 이날 열린 183차 임시중앙종회에 긴급안건으로 발의했다. 중앙종회는 3월11일 무기명비밀투표 끝에 이를 가결했다.

그러나 이 소식이 전해지자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은 강하게 반발했다. 명진 스님은 3월14일 일요법회에서 “봉은사 직영전환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공표한 데 이어 21일에는 “봉은사 직영전환은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의 외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봉은사 직영전환 문제는 정치권으로까지 번졌다. 추측성 보도들이 줄을 이으면서 세간의 이목이 조계종으로 향했다. 안정을 찾았던 조계종도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봉은사 사태는 자승 스님의 위기관리 능력을 가늠하는 첫 시험대가 됐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56호 / 2020년 10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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