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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송에서 부처님 만나고 기쁨을 얻다

  • 불서
  • 입력 2020.10.12 11:40
  • 수정 2020.10.12 11:42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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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록’ / 박상준 지음 / 조계종출판사

‘몽유록’<br>
‘몽유록’

“不是物兮早騈拇(불시물혜조변무) 許多名相復何爲(허다명상부하위) 慣看疊嶂煙蘿裏(관간첩장연라리) 無首猢猻倒上枝(무수호손도상지) : ‘한 물건도 없다’ 해도 벌써 군더더기인데/ 허다한 이름과 모양은 또 뭘 하자는 건지/ 첩첩 멧부리 안개 낀 넝쿨 속을 잘 들여다보니/ 머리 없는 원숭이가 거꾸로 나무를 기어오르네.”

경허선사가 ‘지리산 영원사(智異山 靈源寺)’라는 제목으로 지은 이 시를 그 옛날 중국 당나라 때 5조 홍인대사 문하의 신수와 혜능의 대거리까지 끌어들여 해설하고, “아무리 똑똑한 척 유난 떨어봐야 소란스러운 원숭이 꼴을 면치 못한다. 원숭이놀음이라도 제법 그럴싸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머리가 텅 빈 원숭이들의 놀음이니, 봐줄만한 게 있을까? 제대로 기어올라도 시원찮을 나무를 물구나무를 서서 거꾸로 기어오르겠다고 난리법석들이니 원…. 경허 스님은 쯧, 쯧, 혀를 찼을 것”이라고 풀어내며 세간과 출세간에서 우왕좌왕하며 좌충우돌하고 시비다툼을 일삼는 이들에게 일갈하는 글맵시가 예사롭지 않다.

한문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만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세속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 2019년 9월 갑작스런 병환으로 세연을 마친 박상준 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가항력의 아픔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런 시간들마저 유심히 마주 보았다. 사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불교를 알게 되었고, 어쩌다 한문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길에서 주운 시구(詩句) 하나 게송(偈頌) 한 구절에 기이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해지고 통증이 가라앉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그게 일회성이 아니라 반복해서 일어났으니, 아름다운 시나 경전 속 게송 한 수는 그에게 명약이요, 아픔을 함께한 둘도 없는 벗이었다.

그는 평생 빈고(貧苦)와 병고(病苦)에 시달렸지만 부처님 가르침을 향한 발걸음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흔들림도 없었다. 이 책 ‘몽유록(夢遊錄)’은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흠모했던 동문과 지인들이 뜻을 모아 그의 꿋꿋한 기상과 발자취를 추모하고자 생전에 법보신문을 비롯해 인연 닿는 곳에 기고했던 편편의 원고들을 모아 엮은 유고집이다.

소동파의 ‘전적벽부’에 나오는 ‘천지에 빌붙어 사는 하루살이 신세(기부유어천지, 寄蜉蝣於天地)’라는 구절을 전용해, 사바세계에 잠시 빌붙어 사는 별로 쓸모없는 인간이란 뜻에서 스스로를 ‘기바산인(奇婆散人)’이라 칭했던 그에게 시와 게송이 무엇이기에게 그토록 명약이 되었을까?

박상준 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이 생전에 병고 속에서도 기쁨을 얻었던 시와 게송을 풀어낸 글을 엮은 유고집 ‘몽유록’이 발간됐다.
박상준 전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이 생전에 병고 속에서도 기쁨을 얻었던 시와 게송을 풀어낸 글을 엮은 유고집 ‘몽유록’이 발간됐다.

저자는 시를 두고 “아픔의 절제된 표현”이라 했고, 게송은 “한곳에 꽂혀 옴짝달싹 못하는 마음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뻥 트이게 하는 힘이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시와 게송에 배경 설명을 붙이고 감상을 더할수록 군더더기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까닭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부처를 마주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도 중생, 너도 중생, 둘러봐도 모두 중생뿐이라면 ‘말’을 전하지 않고서 어떻게 해탈과 열반을 짐작할 수 있겠느냐”고 역설한다. 경전이나 게송에 해설을 붙이고 설명을 하는 일이 부질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목마른 중생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한 물 한잔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전 구절과 한시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시와 게송을 통해 부처를 만날 수 있었던 일이 자신에게 기쁨과 행복이 되었듯, 그 시와 게송을 풀어낸 글을 읽는 이들도 여기서 혹시 기쁨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썼던 글들에서 그가 느꼈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2만원.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556호 / 2020년 10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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