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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성보박물관장 원학 스님

“차 한 잔에 번뇌를 쉬는 순간 삶의 환희를 체험할 수 있어”

녹차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환희' 강조하고자 ‘동다송’ 저술
깨달음 중생에게 나누듯 차로 만난 환희 대중과 나누려 노력
차 수행 방편 삼은 초의 스님, 일상에서 깨달음 가능성 열어

저는 해남 대흥사에 6년 동안 살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 전에는 초의 스님에 대해 듣기만 했고 스님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의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대흥사에서 지내며 ‘동다송’을 읽고 초의 스님을 공부하게 되면서 이 책을 꼭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또 ‘동다송’에 대한 번역서가 시중에는 이미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부분 책이 ‘동다송’ 번역에만 치중되어 있지 초의 스님이 왜 차 생활을 영위했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은 번역서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동다송’ 번역을 수행으로 삼아 ‘향기로운 동다여 깨달음의 환희(歡喜)라네’라는 책으로 처음 출간한 것이 어느덧 7년이 지났습니다.

책의 제목에는 초의 선사가 ‘동다송’을 저술하게 된 동기 그리고 일생 차 생활을 하게 된 초의 스님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문장은 간단하지만 초의 선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했던 차 생활의 사상을 담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커피, 홍차, 인삼차, 또 그 가운데 오미자, 구기자, 쑥이라고 하는 토산 차와 녹차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동다송’을 저술했고 그 근본 사상으로는 ‘환희로움’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환희는 곧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혼자 즐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두 더불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수행자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시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깨달음의 내용을 환희롭게 말씀하지 않는다면 그 깨달음의 내용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6년의 고행 끝에 깨달으셨습니다. 깨달은 뒤 처음 ‘화엄경’을 설하니까 중생이 그 경전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민하셨습니다. ‘진리의 말을 중생들에게 바로 일러주니 중생이 알아듣지 못한다. 그렇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바로 열반에 들 것인가 말 것인가.’ 그때 사천왕이 ‘참 부처가 출연하기 위해서는 수겁 생의 공덕을 쌓아서 오늘의 이 결과가 나타나는데 어떻게 열반에 들려고 하십니까? 과거의 부처님이 어떻게 중생을 지도했는가를 생각해보면 부처님도 그와 같이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간청합니다. 그래서 다시 설법하시게 됩니다.

대신 비유를 댑니다. 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 아이에게 사실적인 이야기를 바로 일러주니까 모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비유해 가면서 상대의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내용이 49년의 설법입니다.

그렇다면 초의 스님이 향기로운 동다라고 하신 이 차를 왜 깨달음의 환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냥 깨달았으면 그만인데 왜 환희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차도 차 자체가 깨끗한 물과 만나 비로소 그 차향이 제대로 나타납니다. 만약 물 자체가 탕 색이 좋지 않으면 차도 맛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녹차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차 이야기는 아닙니다. 차의 탕 색이 맑은 데서 향기가 나온다고 하듯이 수행자도 외형이 맑으면 그것을 우리는 계(戒)라고 합니다. 계가 맑으면 향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향기는 근본적으로는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물론 일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향기만 갖추고는 완벽한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수행자는 중생을 환희롭게 하는 것입니다. 환희심을 같이 발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초의 스님이 동다송을 저술한 원인이고 곧 스님이 일생을 살아간 사상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지식의 연마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요즘은 4차 혁명 시대라고 합니다. 책상에 앉으면 눈앞에서 세계의 첨단 정보를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식 수준은 과거보다 엄청 빠르게 높아졌지만, 지혜는 어떻습니까? 지식과 지혜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에서는 지식은 번뇌의 한 부류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 번뇌를 제거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심성을 말합니다.

왜 현대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생활이 편리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의지가 옛사람보다 약하고 옛사람보다 신뢰성이 떨어지고 옛사람보다 인간미 없이 각박하다고 합니까? 되짚어보면 지혜가 아닌 지식이 우리의 본성을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우리가 적당하게 필요로 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답습하는 것입니다. 지식에 인성을 함몰시켜서 살아간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 전 해인사에 목사님 일곱 분이 오셔서 템플스테이를 하고 가셨습니다. 1박 2일 동안 목사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스님들의 무문관 수행에 대한 궁금증을 물어오셨습니다. 이제는 기독교도 영성 수련이라고 해서 무문관 같은 수련원을 운영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결국 지식으로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저는 목사님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강조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그 마음을 다잡아가는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수행을 초의 선사는 차를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맑히기 위해서 차 생활을 한 겁니다. 수행자는 차 생활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차를 마시는 것처럼 차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선이라는 말은 다시 번역하면 사유수(思惟修)입니다. 생각을 닦는 것이고 생각을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초의 선사는 차 생활이 바로 사유수하는데 가장 기본이 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차 생활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차를 대하신 것입니다.

불교는 중도(中道)입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사상을 갖고 있기에 유교도 받아들이고 도교도 받아들입니다. 조선시대 유별나게 불교를 배척하다 보니 차 문화까지 배척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17~18세기 실학이 들어오고 꽉 막힌 유생이 아닌, 현실적으로 종교를 넘나들며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저 해남 땅의 초의라는 스님이 차에 대해서 안다고 하니 궁금해서 그 스님을 가까이하고 싶은 선비들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초의 스님은 “내가 차를 하는 중”이라는 자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차가 가진 본성, 맑고 깨끗한 향기, 즉 진실심을 갖고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으시며 인간적으로 친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유생들은 자연적으로 불교를 멀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초의야말로 포교의 전략가인 것입니다. 그 어려운 시대에 선비들에게 차를 통해서 불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주었다는 점에서 초의 스님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많은 인연 중에서도 초의와 추사의 인연은 손꼽힙니다. 두 분은 신분이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증조부가 영의정을 지낸 전통적인 유교 집안의 사람입니다. 초의 스님은 시골의 미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한 승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두 분이 왜 일생 가까이 지냈는가, 바로 차 덕분이었습니다. 초의는 추사가 제주도 유배 생활을 할 때 차를 가져가 몇 달 동안 함께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추사는 유배 생활의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초의가 보낸 차 덕분이었고 일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고 회고합니다. 두 사람이야말로 차의 진정성을 알고 소통하며 실천한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가족조차 친밀감이 없다고 합니다. 차를 타고 가면 차창 밖 아름다운 자연의 정서를 느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의 정을 이어줄 수 있는 역할을 바로 차가 지니고 있습니다. 초의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차를 통해서 추사라고 하는 분과 일생 가깝게 지낸 모습만 봐도 그렇습니다.

생전 초의 선사는 스스로 단지 ‘출가사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문을 중국어로는 근식(勤息)이라고 합니다. 부지런히 모든 행동을 닦아 번뇌 망상을 쉬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초의 선사가 차를 가까이하게 된 동기도 결국 이 내용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차 생활은 곧 번뇌를 쉬는 것입니다. 번뇌는 한 번 씻어내면 씻어낼수록 마음이 맑아져서 번뇌가 쌓이지 않습니다. 쓸어내면 쓸어낼수록 더 맑아집니다. 때가 묻은 옷을 씻으면 씻을수록 더 깨끗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번뇌가 씻어지는 사람은 반야 지혜가 생깁니다. 거기에서 구현하는 삶이 환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초의 선사는 차 생활이 곧 도이고 선이라고 생각했으며 출가자의 근본 뜻이 조금도 차 생활과 어그러짐이 없음을 실천하신 분입니다.

앞으로 초의 스님이 쓰신 동다송에 담긴 이야기를 하면서 차는 진정으로 어떻게 마시는 것이 가장 좋은가, 정말 차를 가까이하는 생활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차차 공부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9월29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경선 스님) 선문화관 강당에서 열린 ‘원학 스님 초청 동다송 특강’ 첫 강의에서 원학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56호 / 2020년 10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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