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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수반, 또 하나의 연기

마음과 몸의 필연적 관계 규명 노력은 ‘헛수고’

20세기 후반 철학계, 이전에 주목 못 받던 수반 관계에 관심
수반론에서는 아름다움이 물리 법칙 구애 안 받는다고 간주
심리·물리현상이 실재한다고 받아들이면 수반 설명 딜레마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사물은 다양한 관계로 맺어져 있다. 아무런 관계에도 속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 사물과 사물은 원인과 결과로서, 전체와 부분으로서, 시간 및 공간적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된 개념으로서, 이론과 이론을 확증 또는 반증해주는 관찰로서, 이론과 이론을 이루는 개념 및 법칙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 모든 관계가 연기(緣起)로 포섭된다고 생각한다. 20세기 후반 철학은 그 전에 주목받지 못했던 수반(隨伴)관계를 더 논하게 되었는데, 나는 수반도 연기의 일종이라고 본다.

“수반(supervenience)”이라는 단어는 ‘위에(super) 올라타고 가다(venience)’는 뜻이다. 우리가 “한 떨기 장미가 아름답다.”고 말할 때, 수반이론은 ‘아름답다’는 미학적 속성이 ‘한 떨기 장미’의 물리적 속성에 의존해 존재한다고 본다. 장미라는 물질적 존재가 없으면 아름다움도 없고 장미의 물리적 속성, 즉 그 빛깔과 모양 및 향기가 변함에 따라 아름다움도 동시에 변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수반론은 미학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을 인정하는데, 그럼에도 아름다움이 물리적 법칙에 구애되지 않고 나름대로의 법칙으로 움직인다며 미학적 속성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수반은 원래 윤리학에서 창안된 개념이다. 마이클이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에 정직하다면, 진실만을 말하는 제니퍼도 마찬가지로 정직하다. 정직이라는 도덕적 가치는 진실만을 말하는 물리적 행위에 수반한다. 그러나 정직과 관련된 윤리학의 법칙은 행위와 관련된 물리학의 법칙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정직이라는 도덕 가치는 자율적이다. 한편 수반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심리철학에서는 통증과 같은 심리상태가 특정 신경세포활동과 같은 뇌의 물리상태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마음이 몸에 수반한다고 본다. 그러나 심리법칙은 물리법칙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몸으로부터 자율적이다.

나는 수반을 연기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붓다의 연기에 대한 설명을 상기해 보자.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뇌신경세포가 활동하는 물리현상을 P(physical)라 하고 이에 수반하는 통증인 심리현상을 M(mental)이라고 하면,
P가 있을 때 M이 있으며, P가 생겨나므로 M이 생겨난다.
P가 없을 때 M이 없으며, P가 소멸하므로 M이 소멸한다.

통증 M은 뇌신경세포활동 P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 심리현상 모두가 이런 구조로 설명될 수 있다. 수반은 비록 20세기 후반에야 주목받기 시작한 관계지만, 나는 수반이 연기와 관련한 붓다의 설명을 모두 충족하기 때문에 연기의 일종이라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수반론이 철학계에서 처음 논의되었을 때 적지 않은 수의 철학자가 수반을 인과(因果)의 일종으로 오해했다. 이들은 신경세포활동이 원인이 되어 통증을 결과로 만들었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들이 간과한 것은 인과와는 달리 몸과 마음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나 중간 단계가 없다는 점이다. 결과는 원인이 존재한 후에 생겨나지만, 심리현상은 그 존재적 바탕인 물리현상과 동시(同時)에 일어난다. 통증이 존재하는 시점에 바로 이 통증의 존재론적 바탕인 신경세포활동 상태가 있다. 명화 모나리자가 완성된 시점에 그것의 아름다움이 탄생했지, 완성 후 몇 달 또는 몇 년이 지난 다음에 그것이 아름다워진 것은 아니다. 도덕적 가치도 마찬가지다.

이제 마음이 몸에 그 존재를 의존하면서도 자율적이라는 견해를 비판적으로 고찰해 보자. 영혼의 존재를 신앙으로 믿는 서양인은 마음이 몸과 확실히 다르고 자유로워야만 속이 시원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몸에 의존하면서도 자율적이라는 앞뒤 맞추기 힘든 주장에 그다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수반론자들은 수반하는 속성들이 자율적으로 존재한다고, 즉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나가르주나의 중관철학에 익숙한 불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비판될 수 있겠다.

수반론에서는 수반하는 심리현상인 통증과 그 토대인 물리현상 C-신경세포활동이 모두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 통증이 C-신경세포활동에 수반한다면, 통증은 C-신경세포활동 속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1) 통증이 C-신경세포활동 속에 존재한다면 수반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통증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 수반인데, 통증이 C-신경세포활동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면 수반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통증이 C-신경세포활동 속에 존재하지 않아도 수반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통증이 C-신경세포활동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통증이 왜 D-신경세포활동이나 E-신경세포활동 등이 아니라 굳이 C-신경세포활동으로부터 나오는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1)과 (2)에 의해 통증은 C-신경세포활동에 수반할 수 없다. 
(4) 위의 논의는 모든 심리현상과 그 토대로 받아들여지는 뇌의 물리현상에 적용될 수 있다.
(5) 그러므로, 심리현상은 물리현상에 수반할 수 없다.

서양철학에서처럼 심리현상 및 물리현상이 자성을 가지고 실재한다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수반을 설명할 수 없다.

마음과 몸은 우리 일상에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 둘에 각각 자성을 부여해 실재한다고 오해하고 그것들 사이의 어떤 필연적인 관계를 규명하려 든다면 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수반론의 권위자였던 김재권 교수도 결국 수반론이 마음과 몸의 의존관계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성격도 밝혀주지 못하는 공허한 주장이라고 결론지었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인과와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의 관계를 다루는 수반도 자성 없이 여여(如如)하게 존재하는 공(空)한 현상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편리한 언어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하겠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56호 / 2020년 10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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