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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같은 곳은 없다

기자명 민순의

1인 가족의 증가와 주거난의 심화로 한국인에게 집이 갖는 의미는 어지간히 쇠락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인간에게 집이란 편안함과 휴식을 주는 곳으로서 근본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귀소본능의 원천이다.

집은 희망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닿기 어려운 먼 곳에 있을 것만 같은 이상과 희망도 알고 보면 결국 내가 깃들어 사는 집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 벨기에 작가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에서 희망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나섰던 틸틸과 미틸 남매가 끝내 그 파랑새를 발견한 곳도 침실 머리맡의 새장이었다던가.

최근 미국 콜로라도 대학의 샘 길 교수가 쓴 ‘움직임(Moving)’이라는 논고를 보고 다른 상상을 하게 되었다. 영화 ‘매드 맥스’(2015)의 여전사 퓨리오사가 적들의 온갖 방해를 물리친 끝에 ‘녹색의 땅’이라 불리던 고향에 도착했지만 그 또한 황폐해진 지 오래. 오히려 자신들이 지나왔던 죽음의 늪이 바로 그리워해 마지않던 고향이었음을 자각하고 절규하던 장면을 언급하며, 길 교수는 집 같은 곳이 없음은 바로 집 자체가 없음을 의미한다고 일갈한다. 집 또는 고향으로 상징되는 궁극의 안식처도 희망의 본거지도 본디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다. 영화 속 퓨리오사의 기억에 녹색의 땅은 분명히 실존했던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되지만, 어린 시절 적에게 노예로 끌려가 수천 일이 넘는 시간을 홀로 견뎌왔던 그에게 남은 기억이란 어쩌면 사실과는 다른 것일지 모른다. 초록의 땅은 본래 없던 곳이며 어디에도 없는 곳일 수 있다는 말이다.

비슷한 문제의식이 ‘유토피아(Utopia)’라는 용어에서도 발견된다. 16세기 영국의 저술가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라는 신조어를 지어 자신의 소설 제목으로 붙인 이래 사람들에게 이 말은 ‘이상향(理想鄕)’이라는 의미로 수용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없다’는 의미의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로서 사실상 ‘없는 장소’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모순을 함의한다. 그러니까 이상향이란 곧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인 것이다.

이 백척간두의 궁지에서 길 교수는 ‘움직임’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허무의 절규를 토해낸 퓨리오사는 이내 다시 이동할 것을 결심한다. 그와 그의 무리가 떠나왔던 지옥, 바로 독재자 임모탄의 거점인 시타델로 되돌아가 그곳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그곳이야말로 그나마 물과 녹지가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드 맥스’에 붙은 부제가 ‘분노의 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노(fury)의 주인공인 퓨리오사(Furiosa)가 절망의 다음 순간 내딛은 행보가 새로운 이동이고 움직임이라는 것은 비록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일지라도 그곳을 향해 가는 노정의 발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새로운 이상향, 새로운 고향, 새로운 집을 이루게 되리라는 희망에 대한 은유이다.

인류에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침투한 지 10개월이 지났다. 백신의 출시가 임박한 듯 보이는 여러 기사 속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예견한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간이 다소 길어질지언정 멀지 않은 시기에 백신은 분명히 출시될 것이며, 더 이상 코로나가 크게 겁나지 않게 된 사람들은 코로나 이전의 생활 습관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코로나를 계기로 잠시나마 꿈꾸었던 혁신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한때의 소문으로 치부된 채 시간의 뒤안으로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꿈을 기억하고 새로운 혁신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지금 예상되는 미래에는 이르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모여 또 다른 미래, 또 다른 희망으로 여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인류의 새로운 고향이 될 것이다. 움직임 속에 희망이 있고, 길 위에 집이 있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장 nirvana1010@hanmail.net

 

[1557호 / 2020년 10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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