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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만인을 위한 행복의 길

기자명 마성 스님

출가자 수행 전념이 한국불교 발전의 토대

소승불교 비난하는 것,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난 편견에 불과해
수행을 통해 공덕 쌓는 것은 한량없는 복의 자취를 행하는 것
출가자는 명예·이익을 버리고 ‘만인의 행복’ 위해 수행 전념해야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붓다의 가르침은 기원전 72년 스리랑카 중부지역 마딸레 (Matale)의 알루위하라 (Aluvihara) 동굴에서 최초로 문자로 기록되었다. 이것을 패엽경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 동굴에 밀랍으로 패엽경을 제작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붓다의 가르침은 기원전 72년 스리랑카 중부지역 마딸레 (Matale)의 알루위하라 (Aluvihara) 동굴에서 최초로 문자로 기록되었다. 이것을 패엽경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 동굴에 밀랍으로 패엽경을 제작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불교의 승려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혼자 숲속이나 동굴 혹은 나무 밑에서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이 이기적인 행동인가? 대승불교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위한 수행을 소승이라고 폄하해왔다. 특히 세계불교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부족했던 시절에는 ‘남방불교는 소승불교’라고 공공연히 비난해왔다. 지금도 간혹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각은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편견에 불과하다.

붓다시대의 바라문들도 불교의 승려는 ‘개인의 이익’에만 전념하는 이기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의 비난에 대해 붓다는 제자들이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은 ‘혼자만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만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상가라와-숫따(Saṅgārava-sutta)(AN3:60)와 이에 대응하는 ‘중아함경’ 제143 상가라경(傷歌邏經)에서 붓다는 제자들이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은 ‘만인을 위한 행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한때 세존께서 사왓티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상가라와(Saṅgārava)’라는 바라문이 붓다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희 바라문들은 스스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권하기도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스스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는 사람은 모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덕을 닦나니 그것은 바로 제사로 인한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나 어떤 가족이든지 그 가족을 떠나 집 없이 출가한 자는 오직 자기 한 사람만 길들이고 자기 한 사람만 고요하고 자기 한 사람만 완전한 열반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공덕을 닦나니 그것은 바로 출가로 인한 것입니다.”(AN.Ⅰ.168)

위 질문은 바라문과 사문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즉 바라문은 사제(司祭)로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은 ‘만인을 위한 행복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사문인 불교의 승려들은 출가하여 자신의 수행에만 전념한다. 이것은 ‘혼자만을 위한 행복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도발적인 발언이다. 당시 바라문들은 출가란 자기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소승적 태도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바라문들의 시각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반박한다.

“바라문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상에 여래가 출현한다. 그는 아라한이며 … 세존이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라! 이것이 길이고, 이것이 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그 길을 의지하여 수행한 결과 최상의 목적인 열반을 증득하여 그들에게 설한다. 오라! 그대들도 내가 말한 대로 수행하면 최상의 목적인 열반을 증득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스승은 법을 설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수행한다. 그들은 수백 명, 수천 명, 수십만 명에 달한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할진대 출가로 인해 공덕을 쌓는 것이 오직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겠는가, 아니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출가로 인해 공덕을 쌓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AN.Ⅰ.168-169)

한역 ‘중아함경’의 상가라경(傷歌邏經)에서는 여래가 아니라 어떤 사문이 스스로 도와 이 도를 행하면 모든 번뇌를 다해 번뇌가 없게 된다. 그러면 그는 심해탈(心解脫)・혜해탈(慧解脫)을 얻어 스스로 깨달아 ‘나의 생은 이미 다했고, 범행(梵行)은 이미 섰으며 해야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하고, 또다시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하고, 이렇게 계속하여 한량없는 수천 명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것을 어찌 한 가지 복의 자취만을 행하고, 한량없는 복의 자취를 행하지 않는다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상가라와는 “사문 구담의 제자가 족성자(族姓子), 즉 붓다를 따라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집을 버려 집 없이 도를 배우는 자에겐, 도를 배움으로 인하여 한량없는 복의 자취를 행하는 것이요, 한 가지 복의 자취만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복의 자취만 행한다’는 것은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한량없는 복의 자취를 행한다’는 것은 ‘만인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출가자가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은 겉으로 보면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적 행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수행한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그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게 된다.

요컨대 어떤 붓다의 제자가 수행하여 번뇌를 멸진시키고 마음의 평화로움을 얻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다시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가르침을 펴고,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또다시 다른 사람을 위해 가르침을 펴서 그 숫자가 수천 수만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붓다의 제자들이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은 결코 혼자만의 행복을 위한 길이 아니다. 그 길은 곧 ‘만인을 위한 행복의 길’이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는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해 왔다. 이 때문에 동남아시아의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部)를 소승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그토록 소승이라고 비판했던 테라와다 불교가 오히려 더 대승적이다. 특히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오늘날에는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불교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지역적으로 대승과 소승을 구분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제 한국불교에서도 말로만 대승을 외칠 것이 아니다. 출가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겉으로 이기주의적 행위로 보이는 수행에 전념하기를 권한다. ‘혼자만을 위한 행복의 길’이 곧 ‘만인을 위한 행복의 길’이기 때문이다. 수행에 전념하는 승려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불교는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57호 / 2020년 10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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