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6.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56) 결론 -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⑩ - (3) ‘중고’ 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 하

여왕은 정치권력 갖지 못한 채 종교적 신성 상징하는 존재

국정은 종실 원로인 을제 중심의 귀족연합 과두체제로 운영
선덕여왕 만년에는 김유신이 대장군 직 물려받아 전쟁 담당
성골 신분은 여왕대 왕권 위기 타계 위한 정치적 수사일 뿐

선덕여왕은 갈문왕이라는 남편이 있었고 노년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실제 국정을 담당하지 못했다. 사진은 경주 선덕여왕릉. 문화재청 제공
선덕여왕은 갈문왕이라는 남편이 있었고 노년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실제 국정을 담당하지 못했다. 사진은 경주 선덕여왕릉. 문화재청 제공

26대 진평왕(579〜632)은 54년이라는 오랜 기간 재위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왕권강화와 대당친선외교에 성공하고, 중앙행정관서의 정비, 왕궁의 관리와 수비 기구의 설치, 군사조직의 정비 등 지배체제의 정비를 서둘러서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두지 못한 것이 말년에 가까워 오면서 새로운 정치적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딸만 2인을 두었는데, 큰 딸 덕만은 왕위를 이어 선덕여왕이 되었고, 작은 딸은 진평왕의 4촌 아우인 용수와 결혼하여 김춘추를 출생하였다.

진평왕 말년 즈음의 정치적 불안은 결국 53년(631) 5월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의 반란으로 폭발하였다. 이 반란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으나, 구족(九族)을 멸하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반란의 동기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왕위 계승 경쟁과 관련된 것이었음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8개월 뒤에 진평왕은 서거하고 큰 딸 덕만이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즉위 과정은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 같지 않다. ‘삼국사기’ 선덕왕 즉위년조에서,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國人)’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라고 하여 예외적으로 신성화하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의 찬자 김부식은 사론에서,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거늘, 어찌 늙은 할멈(姥嫗)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하겠다.”라고 혹평하였다. 김부식의 사평은 뒷날 고려시대 유교사관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지만, 신라 당대에서도 논란이 많았던 것 같다.

선덕여왕을 추대한 주체로서 적시된 ‘나라 사람들’은 중앙의 귀족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직접적으로는 귀족회의(和白)가 결정의 주체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왕의 즉위에는 반대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분위기는 여왕 재위 17년 동안 내내 수그러들지 않았음을 재위 중의 여러 사건들이 말해주고 있다. ‘삼국사기’ 선덕왕조 전반기에는 유난히 기상이변과 천재지변 등의 기사가 빈번히 전해지고 있으며, 백성을 위문하는 조치를 수차 취하였던 것은 불안한 여론과 무관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여왕이 즉위할 때의 연령이 이미 노령으로 병약했던 점도 불안을 가중시켰던 것 같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 5년(636) 3월 여왕이 병이 들었는데, 의술과 기도로 효험이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열어 승려를 모아 ‘인왕경(仁王經)’을 강하게 하고 100명에게 승려가 되는 허락하고 있었으며, ‘삼국유사’ 밀본최사조에서도 선덕왕 덕만이 병이 든 지 오래되어 흥륜사 승려 법척(法惕)이 왕명에 의하여 병을 돌보았으나, 오랫동안 효험이 없었고, 마침내 밀교 승려인 밀본(密本)이 ‘약사경’을 독송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선덕여왕은 불교신앙을 통하여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려고 하였는데, 우선 ‘선덕’이라는 왕호 자체가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相經, 일명 大雲經)’에 등장하는 전륜성왕의 복덕을 지닌 인물의 이름에서 취한 것이었다. 선덕여왕대는 특히 불사(佛事)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뒤를 이은 진덕여왕대에 한 건의 불사도 없었던 것과 대조된다. 선덕여왕 3년(634)에는 분황사(芬皇寺), 4년(635)에는 영묘사(靈廟寺) 등이 연이어 창건됨으로써 경주의 이른바 전불시대의 가람터에 세워진 7개 사찰 가운데 2개가 선덕여왕 전반기에 세워졌다. 그리고 후반기인 선덕여왕 14년(645)에는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웠는데, 이 목탑은 실로 ‘중고’불교의 최대 건축물이자, 국왕 권위의 최대 상징물이었다.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스투파(불탑) 신앙은 석존의 열반 직후 8명의 국왕들의 봉안불사에 의해 시작되어 아쇼카왕의 이른바 8만4천탑의 조성으로 극대화되었으며, 중국에 전해져서 역대 제왕들에 의한 사리의 봉영과 봉안 불사를 통해 제왕의 권위를 한껏 높이는 역할을 하였다. 앞에서 인용한 ‘대방등무상경’에서 ‘선덕’이라는 왕호와 함께 이미 전륜성왕으로서의 사리신앙을 이미 확인한 바 있거니와, 신라에 사리신앙을 실제 전래해 온 것은 자장(慈藏)이었다. 물론 신라에 불사리를 처음 전래해 온 것은 그보다 앞서 진흥왕 10년(549) 양(梁)에서 사신을 보내면서 입학승 각덕(覺德)과 함께 부처의 사리를 가져와서 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봉영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선덕여왕 12년(643) 3월 자장이 당에서 귀국하면서 부처님의 두골과 어금니와 불사리 1백 낱을 부처님이 입던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함께 가져온 것이 사리 신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리 등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설화적인 것이지만, 핵심 문제는 자장이 가져온 사리 가운데 일부를 봉안한 사리탑으로써 황룡사에 거대한 목탑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 황룡사9층탑조에 의하면, 자장이 선덕여왕 5년(636)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감응하여 신라 국왕이 천축의 찰리(刹利, 크샤트리아, 眞宗)종족의 왕임을 확인받았으며, 이어 자장은 태화지(太和池) 가에서 신인(神人)을 만나서 “신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위엄이 없어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고 있으니, 귀국하여 9층탑을 세우라”는 권유를 받고, 왕 12년(643) 귀국하였다는 설화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속고승전’ 권24 자장전에 의하면, 자장이 당에 간 것은 선덕여왕 7년(638)이며, 활동한 지역도 장안과 종남산 일대뿐으로 오대산에 간 적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속고승전’의 기록이 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되며, 왕 5년(636) 입당설은 오대산 순례 사실을 끼워넣기 위해 2년을 앞당긴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황룡사 9층탑 건립을 권유한 사실도 경문왕 12년(872) 황룡사를 중창하면서 조성한 ‘황룡사구층목탑사리함기’에 의하면, 종남산의 원향선사(圓香禪師)가 귀국하려는 자장에게 “내가 관심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매,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라고 하여 ‘삼국유사’와는 다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 사실도 물론 ‘속고승전’의 내용이 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자장의 문수신앙과 사리신앙은 종남산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도선(道宣, 續高僧傳의 저자)과 도세(道世, 法苑珠林의 저자) 등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고, 신라의 오대산신앙은 9세기 이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라왕실이 인도의 크샤트리아족이라는 진종설화(眞宗說話), 문수신앙과 사리신앙, 자장의 9층탑 조성 등은 상호 연관된 사건으로써 선덕여왕대의 국왕의 권위 실추와 국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현실적 요구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자장이었다.

선덕여왕은 이미 음(飮,伯飯으로추정)갈문왕이라는 남편이 있었고, 노년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실제 국정을 담당하지는 못하였다. 즉위한 원년(632) 2월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다(摠知國政)는 기록을 보아 실제 국정은 을제가 책임졌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 18년(531) 이찬 철부(哲夫)가 상대등이 되어 국사를 총괄하였다(摠知國事)는 기록과 진지왕 원년(576)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나라의 일을 맡겼다(委以國事)는 기록에 비추어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을제도 상대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을제는 상대등과는 다소 성격을 달리하였던 직책으로 본다. 을제의 국정 담당 사실만이 ‘신(新)・구(舊) 당서(唐書)’에서 특필되고 있었으며, 특히 ‘구당서’에는 종실 대신(宗室大臣)으로 명기되어 있어 왕실의 최고 원로로서 섭정의 지위였음을 알 수 있다. 여왕은 정치권력을 갖지 못한 채 종교적 신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머문 반면, 실제 국정은 종실의 원로인 을제를 중심으로 하는 귀족연합의 과두체제(寡頭體制)로 운영되었다. 귀족 가운데 중심적 인물로는 수품(水品)과 용수(龍樹) 2인이 주목되는데, 선덕여왕 즉위 초반 민심 수습을 위한 조치를 다방면으로 취하는 가운데 4년(635) 이찬 수품과 용수를 보내 주(州)・현(縣)을 두루 돌며 지방민을 위문케 하였다. 그리고 3개월 뒤인 즉위 5년(636) 정월 수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수품은 상대등(일명 上臣)으로서 귀족세력을 대표한 반면, 용수는 내성의 사신(私臣)으로서 왕실의 권력을 장악한 실세였다. 한편 대외적으로 백제・고구려와의 전투가 치열해져 가는 가운데 선덕여왕 6년(637) 알천(閼川)이 대장군이 되어 군사권을 장악하였고, 선덕여왕 13년(644)에는 김유신이 대장군 직을 물려받아 이후 3국통일의 전쟁을 담당하였다.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 내내 왕위의 불안정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12년(643)에는 당 태종까지 신라 사신을 향해 여왕의 교체를 거론하였고, 14년(645) 황룡사 9층목탑 조성 같은 불사에도 불구하고, 그해 11월 상대등이 되었던 비담(毗曇)이 2년 뒤 왕 16년(647) 정월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반란 중에 서거하였고, 반란은 김유신의 뛰어난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그리고 왕위는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國飯)의 딸인 승만(勝曼)이 계승하여 진덕여왕이 되었다. 진덕여왕은 비담난의 연루자 30여명을 죽이고,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았는데, 알천은 귀족의 원로로서 과두체제를 대표하는 위치에 올랐으나, 남산 우지암(于知巖) 6인회의 설화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군사권의 실세는 이미 김유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김유신의 지원을 받고, 아버지 용수의 권력을 물려받은 김춘추가 정치와 외교권을 장악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김춘추는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나당군사협정을 체결하고,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정치와 문화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반면 불교를 대표하던 자장은 지방으로 밀려나고, 불교를 통하여 왕권을 신성시하려는 주장도 사라졌다.

일찍이 진흥왕은 전륜성왕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염원에서 황룡사 장륙존상을 조성하고, 자녀들 이름을 동륜・사륜(금륜)・은륜(?)으로 지었고, 그의 큰 아들 동륜태자는 자신의 아들들 이름을 부처의 가족 이름에서 취하여 백정・백반・국반으로 지으면서 왕권의 종교적 신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정(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딸이 선덕여왕으로 즉위하였고, 대내외적인 여건과 맞물려 왕의 권위가 실추되는 가운데, 부처의 사리신앙을 통하여 신라 왕실을 부처와 일치시키려는 상징적 조작으로써 9층탑을 조성하면서 진종설을 주장하였다. 신라 골품 가운데 성골(聖骨)이라는 신분은 선덕여왕대의 왕권의 위기상황 속에서 진종설을 앞세운 정치적 수사일 뿐이었고, 실체가 없는 상상의 신분일 뿐이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57호 / 2020년 10월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