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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은 제정되어야 한다

마닐라에서 목격한 일이다. 서구 사람이 길에 담배꽁초를 버렸다. 그러자 마닐라 시민 한 사람이 그것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거부했다. 오히려 화를 내고 영어로 “나는 외국인이다”라며 그 자리를 떴다. 순간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전한 서구제국주의의 망령이 떠올랐다. 동종의 인간과 하나 되지 못한 특별한 의식. 나 또한 그러한 의식이 마음에 도사리고 있지는 않을까.

이 나라 안에도 수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하여 장혜영 의원을 비롯한 10인의 국회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 헌법의 평등권에 기반하여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예방하고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차별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포괄적이고 실효성 있는 차별금지법”이라는 법제정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성별, 장애를 필두로 실제 23가지 조항 외에도 “등”을 덧붙여 거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종교계의 보수층이 비판하는 성적지향, 성별정체성도 들어 있다. 이를 독소조항으로 보고 있다. 

관습을 타파하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 필자 또한 유권자의 입장에서 이 법안을 찬성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이므로 불교 세계에서는 명확하다.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경전이 다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대반열반경’의 일천제는 선근 없는 중생인 동시에 불성 없는 무성(無性)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법상종에서는 인간의 종교적 성격을 분류하여 5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성문, 연각, 보살의 세 정성(定性), 부정성(不定性), 무종성(無種性) 중 마지막 무종성은 일천제와 다름이 없다. ‘무량수경’의 주인공 법장 비구의 48원 중 십념으로 왕생을 이루는 제18원에서는 오역죄를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고 한다. ‘법화경’에서 여성은 남자로 몸이 바뀌어 성불한다는 변성남자 성불설은 여성차별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이다. 일승 또는 대승정신에 모순되는 것 같은 경전의 말씀에 대해 동아시아에서는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불법의 대해에서는 무차별한 세계가 어째서 경전에서는 차별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여러 해석 중에서도 극악무도한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경전이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 속에 변화하는 삶이라는 ‘컨텍스트’가 반영된 것이다. 불교의 발전을 따라 이제는 누구든 불성을 지니고 성불할 수 있다는 설은 보편화되었고, 차별에 관한 경전 구절을 인용하지는 않는다. 불교만이 아니라 동서양 종교는 탄생 때부터 사회적 차별에 저항해왔다.  

그럼에도 ‘차별금지법’에서 말하듯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사회적 원인은 자본, 권력, 편견, 무지 등 다양하다. 근본원인은 악의 뿌리인 무명이다. 깨달음의 사회화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는 회광반조의 힘이 솟아나지 않는 한 차별은 인류가 존속하는 동안 지속될 것이다. 선수행의 입장에서는 청원행사선사의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깨달음이 절실하다. 성철선사가 가장 애용한 이 구절은 사회적 차별을 무력화시키는 긴요한 법문일 수밖에 없다. 불타의 제행무상에 대한 깊은 회의가 불법의 꽃인 선문의 이 법문으로 귀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지에 앞서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닌 의식의 진공(眞空) 상태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듯이 이를 내면화하는 성찰이다. 그리고 초월된 원점으로 돌아오면 모든 존재가 절대적 존귀함을 갖는 “산은 산, 물은 물”인 묘유(妙有)의 경지가 나타난다. 깨달음을 통해 전식득지를 체득한 이러한 선수행의 경지를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다. 어떤 존재도 그 누구와 비교불가한 절대성을 갖추고 있음을 불타 이래 숱한 조사들이 증명하고 있다. 불교계야말로 불법의 근본 뜻이 현재화 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도록 앞장서야 된다.

원영상 원광대 원불교학과 교수 wonyosa@naver.com

 

[1558호 / 2020년 10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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