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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종 종정 지허 스님

허무 안고 산에 든 소년, 생사관문 뚫고 종정에 오르다

친구 죽음서 실존 의문
15살에 선암사로 출가

당대 선지식 선곡 스님
‘법기’ 알고 화두 내려

가야·영축·오대산서 구법 
비로암서 두문불출 3년

쓰러진 불상·탑 본 직후
상서로운 사지임을 직감

철감·징효·고봉 주석한
금전산 금둔사 복원중창

차·매화에 평생 지극정성
“이 또한 수행의 하나”

​​​​​​​‘생사일여’ 체득한 사람
‘대자유’ 선물 품을 터

태고종 종정 지허 스님은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체득하면 ‘대자유’라는 큰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전했다.

순천 금전산(金錢山) 서쪽 기슭에 자리한 금둔사(金芚寺) 일주문 앞에 서자 석문(石文)이 물어왔다.

‘萬法歸一 一歸何處(만법귀일 일귀하처)’

당나라 때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萬法歸一),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一歸何處)” 조주 스님이 말했다. “내가 청주(淸州)에 있을 때 적삼 한 벌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네!”

돌에 새겨진 선구가 묻는다. ‘지금, 당신은 정진하고 있는가?’ 

염세·실존주의 대표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하이데거를 중학교 3학년 때 만났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이 우리를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했고, 하이데거는 ‘인간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보았다. 죽음을 찬미하는 듯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자신의 죽음을 직시하며 인생을 좀 더 의미 있게 살라는 충고가 담겨 있다. 그러나 10대 중반의 학생이 이것을 포착하기는 어려웠을 터다. 두 거장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동급생 친구 세 명과 ‘염세주의’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가을이 염세성향에 극단적 허무를 더한 것이었을까? 친구 한 명이 백지에 세 글자 적어 놓고는 수면제 복용하고 삶을 끝냈다. 

‘無(무) 無(무) 無(무)!’

파커 만년필 꽂이의 작은 쇠붙이와 허리띠 버클이 화장터에 남았다.  

‘허무하고, 허무하구나!’

허전함과 쓸쓸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하나의 생각이 스쳐갔다.

‘허무하다고 느끼는 나는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에 의문을 가진 건 그때가 처음이다. 며칠 후 제석산 동화사로 향했다. 그곳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청운 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마음을 아느냐?”
“모릅니다. 어찌하면 알 수 있습니까?”
“참선하면 알 수 있다.”

그해 겨울 12월24일 선암사 산문을 열고 만우 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 했다.(1955)

유독 몸이 약했던 사미에게 큰절의 대중공양 짓는 일은 버거웠다. 며칠이 멀다하고 엄습해 오는 몸살에 정신마저 지쳐 갔다. 두 달 가까이 앓고는 당시 주지 소임을 보고 있던 선곡(禪谷) 스님을 찾아가 힘겨움을 토로했다. 

일주문 앞 큰 돌에 ‘만법귀일 일귀하처’가 새겨져 있다.

용성 스님의 법을 이은 선파(禪坡)스님의 상좌였던 그 선곡 스님이다. 만공 스님이 법상에 올라 법문할 때 선곡 스님이 법을 물으려 하자 “네가 얻은 소식을 일러라!”했다. 이에 선곡 스님은 좌정한 채 미소를 보였다. 만공 스님은 “네가 왔으니 내 법문은 더 이상 소용없다”하고는 법상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법호는 설곡(雪谷)이다. 

“다각(茶角) 소임을 보거라!”

선암사 칠전선원장을 통해 구전으로 내려오는 법제를 익혀가며 차를 만들었다. 찻잎이 물을 만나 풀어내는 향이 무척 좋았다. 새 찻잎을 딸 때마다 강원 공부도 익어 갔다. 

어느 날, 선곡 스님에게 차를 올렸다.

“세상에서 제일 큰 게 무엇이냐?”
“마음입니다.”
“아니다. 하늘이 제일 크다.”
‘분명 마음이 더 큰데, 왜 하늘이 더 크다고 하실까?’하는 의문은 두 달 동안 이어졌다. 차를 들고 다시 참방했다. 침묵이 흘렀다. 차를 다 마신 선곡 스님이 잔을 돌려주며 일렀다.
“내 차는 내가 마셨다.”

그 한마디가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제 차는 어찌하면 마실 수 있습니까?”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알면 마실 수 있다.”

강원 교육을 모두 마치고 선곡 스님을 다시 찾았다.   

“어찌하면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알 수 있습니까?”

선곡 스님은 준비해 두었던 바랑과 가사를 건넸다.  

“고암 스님께 가거라!”

화두 하나 안고 해인사 용탑선원으로 걸음 했다.(1963) 가야산에서 2년 동안 정진 한 후 통도사 극락선원으로 걸음했다. 경봉 스님과 마주했다. 

“어찌 왔느냐?”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해 이를 말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용성 스님이 만공, 혜월, 고봉, 전강 스님 등의 내로라하는 선지식들에게 ‘안수정등’을 들어 보이며 낙처를 물은 적이 있다. “어젯밤 꿈속의 일”이라 답한 만공 스님의 일화는 지금까지 전해질 정도로 유명하다. 

경봉 스님의 일언이 떨어졌다.

“안수정등의 일구를 일러라!”
“남쪽 산의 꽃이 북쪽 산에서 붉습니다(南山花 北山紅).”
“더 정진하라!”

예를 마치고 돌아서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경봉 스님의 한마디가 등에 꽂혔다.

“용성 스님이 없어 한(恨)이다.”

경봉 스님의 한마디에 은연 중 힘이 솟았다.  

극락선원에서 1년 2개월 정진한 후 통영 미래사 서쪽 토굴에서 2년 정진했다. 구법의 길은 덕숭산, 오대산 등으로 이어졌고 발길은 다시 선암사에 닿았다.(1972) 

조계산 ‘비로 토굴’에서 두문불출한 채 3년 정진했다.

흔적조차 사라진 조계산 비로암(毘盧庵)터에 올라 주변의 나무와 돌을 모아 토굴을 짓고 가부좌를 틀었다. “결판을 내겠다!”고 작심한 지허 스님은 이곳에서 두문불출 한 채 3년을 보냈다. 

한겨울의 눈바람이 세차게 들어찰수록 화두는 더욱 더 성성해져 갔고,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의 단계를 넘어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 정도에 이르렀다. 새 울음은 정진 일깨우는 소리였고, 떠가는 구름은 포행 길 도반이었으니 ‘날마다 좋은 날’이었다. 

어느 날, 산에서 나무 한 짐 지고 산비탈을 내려오던 중 지게 목발이 돌부리에 걸려 20바퀴를 굴렀다. 다행히 큰 해는 입지 않아 바로 일어섰다. 

그런데 아뿔싸! 화두가 사라졌다. 구르는 와중에 엄습해온 공포에 화두를 놓친 것이다.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부처님 뵐 면목이 없구나.” 

불철주야 용맹정진에 돌입했다. 

머리가 가을 하늘처럼 맑은 날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하늘과 땅이 무너져 내렸다. 마당으로 내려가 작대기를 이용해 떠오른 시 한수를 썼다. 

천심비로화개홍(千深毘盧花開紅)
만리장천안성백(萬里長天雁聲白)
용로중출청량월(鎔爐中出淸凉月)
삼라상두무영인(參羅上頭無影印)

비로토굴 천길이나 깊은데 꽃은 피어 붉고
만리의 너른 하늘 기러기 소리 맑네.
용광로 가운데 서늘한 달이 뜨니
삼라만상 머리에 그림자 없는 도장을 찍는구나.

열다섯 살 때 선암사로 출가한 지허 스님은 2020년 7월15일 태고종 20세 종정에 추대됐다.

금둔사 3층석탑과(보물 945호)과 석불비상(보물 946호).

금둔사 태고선원(太古禪院)에서 만난 지허 스님은 손수 덖은 ‘천강월(千江月) 잎차’를 우려냈다. 낙안 금둔사와 벌교 용연사 언저리의 오랜 토종 자생 차밭에서 딴 잎으로 만든 차다. 금둔사 인근에는 지허 스님이 조성한 3만3000㎡의 차밭 ‘지현다원(知玄茶園)’이 있다. 비료는 물론 거름도 주지 않고 순수 야생 차나무로 키워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행자 때는 물론 선암사 주지 소임 볼 때도 선암사 칠전선원 뒤의 차밭, 대각국사 의천 스님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그 차밭에 정성을 쏟은 지허 스님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각 소임도 제게는 벅차게 다가왔습니다. 하루 종일 만들어 봐야 30여명의 노장 스님들이 한 번 드시면 끝이었습니다. ‘절과 인연이 없구나!’ 사중에 쓰일 3일치 차만 만들고 하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삼일 치는 고사하고 이틀 치도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내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차는 선정으로 이끄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한다고 강조했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여, 선(禪) 있는 곳에 차(茶)가 있습니다. 뿌리를 깊게 내린 토종 차나무가 생성한 잎은 섣불리 낙엽으로 지지 않습니다. 한 번 잡은 화두를 놓지 않는 선객의 특성과 닮았습니다. 향은 은은하면서도 깊습니다. 지혜와 자비가 깃든 선지식의 향훈이 느껴집니다.”  

선암사 대중의 정진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던 의중이 엿보인다.

백제 위덕왕(威德王) 30년(583) 담혜화상(曇惠和尙)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 금둔사를 복원한 장본인도 지허 스님이다. 

선암사 주지 소임을 보던 1979년 7월이었다. 산사를 찾는 스님들에게 내놓을 ‘맛있는 수박’을 찾던 중 금전산에 이르렀다. 마침 수박 파는 곳이 있어 몇 통 담아 달라 하고 무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만치 뭔가 보였다. 

“형언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가보니 불상이 누워 계셨습니다. 며칠 후 다시 가 살펴보니 석탑도 쓰러져 있었습니다.” 

태고선원에서 바라 본 낙안읍.

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사지임을 직감하고는 그 일대의 땅을 사들였다. 1983년 복원불사를 시작해 대웅전과 태고선원을 포함한 10여동의 전각을 세웠다.

“금둔사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을 연 철감국사(澈鑒禪師)와 그의 제자 징효대사(澄曉大師)가 주석해 선지를 펴던 선종가람입니다. 고려 말의 고봉(高峰) 스님도 금둔사를 중창한 후 산내에 수정암(水晶庵)을 짓고 주석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금둔사가 금전산에 있다(金芚寺 在金錢山)고 기록돼 있습니다. 숭유억불 속에서도 16세기까지 법등을 밝혔던 절입니다.” 

지허 스님의 첫 눈에 든 3층석탑과 석불비상은 문화재로 인정받아 보물 945·946호로 지정됐다. 금둔사에는 백매, 청매, 홍매 등 100여 그루의 매화가 봄의 다가옴을 알린다. 그 중 압권은 음력 섣달에 피는 납월매(臘梅花) 여섯 그루다. 모두 홍매다. 

“세차게 날리는 흰 눈 사이로 자태를 드러낸 붉은 매화가 황벽 선사의 일갈을 내뿜습니다. ‘뼈 깎는 추위를 겪지 아니하고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을 얻겠는가?’ 희유하게도 부처님 성도일인 납월 팔일 전후에는 한두 송이라도 꼭 피워내고는 묻습니다. ‘부처님 오신 뜻을 알겠는가?’ 수행에는 승속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경전, 기도, 염불, 위빠사나, 참선. 성향에 맞는 길을 찾아 묵묵히 걸어가면 됩니다. 그 여정에 금둔사 납월매 만날 기회 있으며 법거량 한 번 나눠 보시기를 권합니다.”

차와 매화 향 짙은 금둔사에 참배했다면 삼층석탑을 유심히 살펴보시라. 차 공양 올리는 스님을 만날 것이다. 

친구의 죽음에서 허무를 보았던 지허 스님은 죽음을 어떻게 가름했을까?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법의 바다를 65년 항해 한 선승의 일언 이어서일까? 불자라면 누구나 아는 ‘생사일여’가 사자후로 들려왔다.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선풍(禪風)이 태고종에 불 듯하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체득한 사람은 ‘대 자유’라는 큰 선물을 품을 겁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지허 스님은
만우 스님을 은사로 1955년 출가했다.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과 양산 통도사 극락선원, 통영 미래사 토굴 등지에서 정진했으며, 고암, 경봉, 전강, 구산 스님 등을 찾아 수행의 깊이를 더했다. 선암사로 돌아온 스님은 폐허가 된 비로암터에 토굴을 짓고 3년간 두문불출 한 채 정진했다. 선암사 불사를 일으켜 사격을 높였으며 1979년 7월 시작된 순천 금둔사 복원 중창도 이끌었다. 선암사 주지(1994~1997), 태고종 종권수호위원회 위원(2002), 제11대 중앙종회의원, 태고중앙선원장(2005), 선암사 부방장, 제2·4·5대 원로회의 의원을 지낸 바 있다. 현재 금둔사에 주석하고 있다.

 

[1558호 / 2020년 10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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