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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리그의 피아노 작품

기자명 김준희

음악으로 묘사한 노르웨이 대자연은 ‘극락장엄’

나폴레옹 이후 민족의식 대두로 민족·국민성 담은 음악 등장
바이킹에 뿌리 둔 노르웨이 음악 수준 높이려 노력한 작곡가
피아노협주곡에 산맥·전설·피오르드·농민 이야기까지 담아내

에드바르 그리그(1888).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자필 악보.

바로크와 고전을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음악은 주로 이탈리아와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가 중심지였다. 그 밖의 나라에서는 음악사의 주류를 이룰만한 눈에 띄는 업적은 없었지만, 각기 독특한 민족음악 혹은 국민음악은 존재해 왔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벌에 실패한 이후, 각 나라들에서는 민족의식이 대두되었고 독립을 서둘렀다. 이러한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민족성과 국민성을 담은 작곡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국의 풍경과 전설 등을 배경으로 하는 그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취를 담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험한 바다에서 생활해왔던 바이킹의 후예들은 고유한 자연과 전설, 그리고 민속음악을 즐겼다. 민요나 거친 춤곡 등이 대부분이었던 그들의 음악은 수준 높은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미흡했다. 민족주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1843~1907)는 모국인 노르웨이의 음악을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원래 독일 음악의 본거지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수학하며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그의 초기 작품들은 독일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소품들이 대부분이었다. 

3년간의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그리그는 당시 북유럽의 음악 중심지였던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민족음악가 리카르 노르드라크(1842~1866)를 만나 민족주의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서로의 사상과 철학을 공유하며 그들은 노르웨이의 민족적인 음악을 발전시킬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2년도 되지 않아 노르드라크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그는 노르드라크와의 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하고 그를 위해 ‘장송행진곡 A단조’를 작곡한다. 그리그는 “노르드라크는 음악 이상의 것을 알고 있는 친구”라고 말 할 정도로 그와 음악적 교류를 즐거워했다. 이 작품은 친구를 잃은 슬픔과 그와 함께 했던 추억이 공존하는 곡으로 폭넓은 음색을 담고 있어 금관 앙상블로도 자주 연주된다.

1868년 그는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16’을 작곡한다. 이 곡은 그리그의 유일한 협주곡이자 명곡 중의 명곡으로 북유럽의 정서를 흠뻑 느낄 수 있다. 그리그는 스스로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이 협주곡에 연주자의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다양한 기교를 담았다. 이 작품을 들은 리스트는 “이것이야말로 스칸디나비아의 혼이다”라고 극찬하면서 그리그에게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대로만 계속 하십시오”라고 격려했다.

“노르웨이를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다”라고 말할 만큼 그리그는 조국 노르웨이를 사랑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는 노르웨이의 대자연이 담겨있다. 팀파니와 함께 시작하는 곡의 첫머리는 피아노의 강렬한 첫 코드와 하강하는 화음들로 가득 채워진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정열을 모두 담은 것 같은 첫 악장은 거대한 노르웨이의 숲을 연상시킨다. 침엽수림에 쌓인 눈, 골짜기마다 흐르는 맑고 차가운 냇물, 그리고 그것을 비추는 강렬한 태양. 단순한 음형이지만 거대한 자연을 묘사하기에는 충분하다. 노르웨이의 피아니스트인 E. 스텐-뇌클베리는 “이 곡은 무겁고 장엄한 후기 낭만주의 작품과는 달리 북유럽적인 서정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따스하고 밝으며, 장중하면서 또한 민족적이다.”

첫 악장의 강렬한 종지 이후 서정적인 두 번째 악장은 바이올린의 감미로운 선율로 시작된다. 전형적인 3부 형식(ABA)인 이 곡의 첫부분은 피아노 없이 오케스트라의 연주로만 이루어진다. 현악기 위주로 연주되는 아름다운 선율을 호른의 연결구가 받으면 피아노가 수줍게 등장하다가 곧 급격한 변화를 보여준다. 영롱하면서도 섬세한 선율은 곧 폭우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터치의 패시지로 바뀌고 마치 비가 그친 듯 고요하게 마무리된다. 독특한 분위기의 2악장을 들으면 부처님께서 극락장엄에 대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극락에는 칠보로 된 여러 가지 나무가 세계에 두루 가득하다. 금, 은, 유리, 파려, 산호, 마노, 자거나무 등이다. 혹은 두 가지, 세 가지 내지 일곱 가지 보배로 합하여 이루어졌다. (중략) 보배나무들은 서로 줄지어 서있고, 줄기와 줄기는 서로 바라보고, 가지와 가지가 고르고, 잎과 잎은 서로 마주보고, 꽃과 꽃은 서로 다르고, 열매와 열매는 서로 균형이 잡혀 있어 그 찬란한 빛은 눈이 부시어 바라볼 수 없으며, 맑은 바람이 불면 다섯 가지 음악 소리가 나오는데, 미묘하고 저절로 서로 조화를 이룬다(‘무량수경’ 중에서)”

마지막 악장은 특히 노르웨이를 닮았다. 그리그가 노르웨이의 전통을 음악에 담고자 했던 의지가 돋보인다. 노르웨이의 민요풍 선율 뿐 아니라 산간 지방 사람들이 즐겼던 무곡의 리듬을 바탕으로 ‘하르당게르 피들’이라는 민속 악기의 연주 형태를 모방했다. 광활한 피오르드 해안가나 태양 가득한 웅장한 산세를 표현하듯, 빠른 박자로 계속되는 마지막 클라이막스는 금관악기와 함께 마무리 된다. 

그리그는 ‘피아노 협주곡’을 통해 노르웨이의 대자연을 가슴 벅찬 감동으로 구현했다. 그는 자연 속에 구원이 있다고 믿었다. 그가 빚어낸 청명하고 차가운 선율들은 노르웨이를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그의 작품을 통해 노르웨이의 전통음악과 민족적 소재에 대한 모든 것,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전설과 산맥, 피오르드와 농민의 이야기가 되살아나 숨쉬기 시작했다.

‘무량수경’에 등장하는 극락정토의 모습과 그리그가 ‘피아노 협주곡’에서 구현하고자 한 노르웨이의 대자연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보배나무에는 어느 하늘 보다 뛰어난 음악이 흘러나온다. 저절로 만 가지 기악이 있고, 그 악기소리는 진리의 법음이 아닌 것이 없다. 맑고 애절하며 미묘하고 온화하여 시방의 음성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

그리그는 ‘발라드 G단조 Op.24(1876)’을 통해 조용하고 우아한 노르웨이를 표현했다. 모국의 음악을 수준 높은 예술로 끌어올리기 위한 또 다른 시도였다. 서유럽의 작곡가들은 할 수 없는 감성으로 빚은 노르웨이의 정경을 피아노 선율로 들으며 무량수경에 나타난 극락정토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시들지 않는 차가운 눈꽃과도 같은 그리그의 작품이 더욱더 청량하게 느껴진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558호 / 2020년 10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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