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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

기자명 홍창성

남도 나 같은 의식 가졌다는 건 ‘일반화 오류’

내가 타인의 감각내용을 그 사람 관점에서 느낄 방법은 없어
겉으로 드러나는 타인의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리할 뿐
내가 깨쳤어야만 누군가 깨쳤음을 안다는 것도 비슷한 문제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어릴 적 누구나 눈을 감고 지그시 눌러 보며 시야에 나타나는 둥근 상을 보며 신기해한다. 학교에서는 시각이 형성되는 과정을 배우며 의식에 떠오르는 상이 눈으로 들어온 신호로 구성된다고 배운다. 그밖에 소리, 냄새, 맛, 그리고 물질의 단단함 등도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뇌 또는 마음이 해석하여 만든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와 관련해 철학은 우리의 상식에 도전하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모든 감각이 차단된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우리 의식에는 세계의 모습을 알려줄 어떤 내용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실은 세계가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확인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이가 오감(五感)을 하나도 갖추지 못한 채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의식 밖 세계의 존재에 대해 털끝만큼이라도 알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마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상태와도 같을 것이다.

같은 문제를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 마음 밖 세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각내용이 마음속으로부터 저절로 솟아난다고 가정해 보자. 불교의 유식론이나 18세기 버클리의 관념론은 이와 유사한 가정을 바탕으로 한 철학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상식적으로 믿는 것처럼 마음 밖 세계가 존재한다고 느낄까? 그럴 것이다. 느끼는 대로의 세계는 우리에게 어떤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과 마음속 온갖 상념들의 존재는 의심하기 어렵다. 마음 밖 세계의 존재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감각내용이 마음속에서 저절로 생기더라도 우리 인식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마음 밖 세계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철학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는 마음과 마음속 상념들만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을 뿐이다. 마음을 영혼 및 자아(self)와 동일시한 서양에서는 자기 마음과 그 안의 상념들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견해를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이라고 부른다.

불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체로서의 마음의 존재마저 부정하며 그것을 단지 끊임없이 생멸하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묶음으로 본다. 서양에서도 18세기 데이비드 흄 이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철학자는 마음을 실체로 보지 않고 ‘느낌의 연속’ 또는 ‘끈처럼 이어지는 의식’으로 이해했다. 우리도 논의의 편의를 위해 마음을 이렇게 이해하며 일단 그 존재를 받아들이자.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의 마음의 존재를 확신하더라도 다른 이의 마음의 존재도 그토록 확신할 수 있는가?

나는 내 의식 속에 있는 것들에 직접 접근한다. 예를 들어 내가 치통을 앓을 때 나는 그것을 직접 느낀다. 의사가 뭐라 하든지, 아니면 기계의 그래프가 어떻게 나오든지 내가 치통을 느끼면 나는 치통을 앓는 것이다. 나는 내 의식 속에 진행되는 일을 확인하는 데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내가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한 그것에 오류가 있을 수도 없다. 철학자들은 이와 같이 내 의식에 관한 나의 직접적 접근성, 1인칭 입장에서의 권위, 그리고 무오류성(infallibility)을 인정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의식에는 어느 누구도 직접 접근할 수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의 감각내용을 그 사람의 관점에서 느낄 방법은 없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타자(他者)가 의식을 가지고 이런저런 사고(思考)와 감각적 경험을 갖는다는 점을 확인하는 유일한 길은 타자가 겉으로 드러내는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리하는 방법뿐이다.

일그러진 얼굴로 신음하며 어금니를 움켜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에게 치통이 있다고 판단한다. 식당에서 메뉴를 읽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그가 곧 음식을 주문할 것으로 추측한다. 대학지원서를 작성하는 학생을 보면 그가 대학에 진학할 의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주말에 뭐해?”라는 질문에 친구가 “등산 가!”라고 답하면 우리는 그가 등산 계획이 있음을 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행동과 언어행위를 통해 그의 의식내용을 간접적으로 파악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했듯이, 우리는 스스로의 경우와 비교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한다. 내가 치통을 앓을 때 아픈 표정으로 신음소리도 내고 이를 붙잡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유사한 행동을 보이면 그가 치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배고플 때 식당에 가는 행위, 입학지원을 위해 서류를 작성하는 행위, 그리고 등산 갈 의도를 말로 표현하는 행위 등도 모두 나의 경우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의식내용을 추리해 낸 결과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 추론은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비약을 포함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의식에 접근할 수 없어서 그의 의식과 행동양식 사이의 관계를 직접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의식내용과 그에 관련된 나의 행동양식’에 비추어 다른 이의 행동을 보고 그의 의식내용을 추론하게 된다. 문제는 이 추론의 기반이 겨우 나의 경우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떻게 나의 경우 하나를 바탕으로 그토록 무책임하게 지구상 수십억 명 다른 사람들의 경우를 추론하는가? 논리학은 이런 추론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며 경고한다.

나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다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음과 의식내용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논리적 비약 없이 증명할 방법은 없다. 철학자들이 수 세기 동안 고민해 왔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이제 불교와 관련해 질문해 보자. 우리는 깨친 사람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 우리가 그의 의식에 직접 접근하지 못하니까 그의3 행동을 보며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어떤 전통에서는 내가 깨쳤어야만 (내 의식 상태와 행동양식의 상관관계를 바탕으로 그의 행동을 보고 추론해) 그가 깨쳤음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추론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

이보다도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자신이 깨쳤다는 점을 스스로 어떻게 파악하는가? 그것은 ‘앎’의 일인가 아니면 ‘어떤 느낌에 대한 경험’의 일인가? 다음 연재에서 이와 관련된 문제를 다뤄 보겠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58호 / 2020년 10월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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