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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중창불사 이끈 흥천사 불사도감 금곡 스님

  • 집중취재
  • 입력 2020.11.02 13:42
  • 수정 2020.11.02 14:30
  • 호수 1559
  • 댓글 0

“흥천사 중창불사는 신심·원력·기도로 일군 결실…떠올리면 기분 좋고 언제든 가고 싶은 도량 가꾸고 싶어”

2008년 재무부장 때부터 흥천사 토지매각 반대…“사찰 땅 매각은 불교정신 훼손”
“자네만 믿네” 설악무산 스님 당부·자승 스님의 전폭 지원에 흥천사 복원불사 시작
2011년 10월21일 50년 만에 조계종 사찰로 회복… 정화 2세대가 이룩한 정화불사

흥천사 불사도감 금곡 스님은 2011년 6월21일 주지로 임명 받은 뒤 10여년간 흥천사 중창불사를 진행했다. 경내에 있던 사하촌 22가구 80세대를 이렇다 할 분쟁 없이 이주시켜 도량을 말끔히 정리했다.

“오늘날 흥천사가 아름다운 도량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희망을 꿈꿨던 신도님들과 역경 속에서도 헌신해 온 종무소 대중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흥천사가 모든 분의 꿈이 이뤄지는 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정진할 것입니다.”

10월17일 서울 돈암동 흥천사가 전법회관을 개원했다. 전법회관은 불사도감 금곡 스님이 2011년 주지로 부임한 이후 10여년간 진행한 중창불사의 결실이기도 했다. 스님은 이날 주마등처럼 스쳐간 지난 세월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소환했다. “자네를 믿네”라는 신흥사 조실 설악무산 스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매각 위기에 놓인 흥천사 주지를 맡았던 일, 경내에 22가구 80세대 주민을 분쟁 없이 이주시켰던 일, 막대한 이주비와 중창불사비용에 쫓기면서도 경로잔치를 열고 지치고 힘든 이웃들을 먼저 챙겼던 일, 하루도 공사장 기계음을 멈출 수 없었던 지난했던 중창불사 과정들까지. 스님의 기억 속에 스쳐지나간 10년은 흥천사가 왕실사찰로서의 옛 명성을 되찾고, 지역주민의 희망도량으로 발돋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금곡 스님이 주지로 오기 전까지 흥천사는 굴곡진 한국불교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비운의 사찰이었다. 1397년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흥천사는 한때 170여 칸의 전각이 들어설 정도의 대가람이었지만, 연산군 때인 15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됐다. 이후 1794년(정조 18) 성민·경산·경신 스님의 발원으로 정릉의 현 위치로 이전됐고, 절 이름도 신흥사로 바꿨다. 그러다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각지에서 시주를 받아 현재의 대방을 건립했고, 사찰의 이름도 흥천사로 복원했다. 

그러나 흥천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세가 크게 위축됐고,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에도 종단 관리에서 벗어나면서 쇄락의 길을 걸었다. 사찰의 법적 재산권은 조계종에 있었지만 결혼한 스님들이 점유하면서 흥천사는 늘 논란의 중심지가 되곤 했다. 수만 평에 달하던 흥천사 넓은 땅은 알게 모르게 팔려 나갔다. 

2005년 10월 조계종 재무부가 중앙종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1년까지 매각 승인된 흥천사 토지면적만 4만 9514평에 달했다. 

금곡 스님이 첫 인연을 맺을 당시인 2008년에도 흥천사는 토지매각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2006년 7월, 당시 주지스님이 종단 승인 없이 흥천사 토지를 매각하기로 계약하고 계약금과 중도금조로 16억5000만원을 받은 사건이 발생했다. 뒤늦게 사실을 파악한 조계종은 이 스님에 대한 징계절차를 밟고, 등기소에 토지 명의이전 금지를 요청했다. 다행히 토지소유권이 넘어가진 않았지만, 주지스님이 받은 16억5000만원은 대부분 소진된 상태였다. 

계약한 업체는 조계종을 상대로 계약금과 중도금 반환을 요청했고, 중앙종회와 총무원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러나 16억5000만원을 회수할 길이 막막했던 조계종은 다시 흥천사 토지매각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 소식은 2008년 9월30일 재무부장으로 임명된 금곡 스님에게도 전해졌다. 스님은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찾았다. 
 

중창불사가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도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열어 공양과 선물을 나눴다.
지역 맞벌이 부부의 보육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무슨 말씀을 드렸나?
“절대 땅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총무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땅을 팔면 그동안의 성과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1970년대 조계종은 종단 목적사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강남 봉은사 일부 토지를 매각했지만, 그에 대한 공과보다는 땅을 판 것에 대한 평가만 남은 게 현실이었다.”

▶토지매각 말고 다른 대안이 있다고 봤나?
“종단에 예치된 토지처분금을 활용하거나 화주(化主)를 통해 급한 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토지처분부터 생각하면 안 된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파는 것은 우리 역사와 정신을 파는 것이다.”

▶총무원장스님의 반응은 어땠나?
“총무원 부실장과 협의까지 끝난 사안을 다시 되돌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관 스님은 아무 말씀 없이 묵묵히 제말을 끝까지 들어주셨다. 이후 스님께서는 다른 부실장을 모아 놓고 ‘정념(훗날 금곡)이가 사표까지 써와서 반대를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땅을 팔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몇 개월 뒤 한 부장스님에게 들었다.”
금곡 스님의 반대로 2008년 흥천사 토지매각은 백지화됐다. 그러나 흥천사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전임 주지가 받은 16억5000만원에다 사하촌 주민들 이주비까지 100억원이 넘는 돈이 필요했다. 2011년 3월 다시 이 문제가 불거졌다. 총무원은 토지매각 없이 흥천사를 정상화시킬 방안이 없다고 판단하고, 흥천사 토지를 145억원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중앙종회가 강하게 반대했다. 중앙종회는 재정분과위원회 차원에서 소위를 구성해 대응방안을 찾기로 했다. 

▶당시 재정분과위원으로 현장조사에 참여했다. 그때 흥천사는 어땠나?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사하촌에는 낡은 집들이 난립했고, 주변은 정비가 되지 않아 어수선했다. 그러나 흥천사는 역사를 간직한 사찰이다. 부지가 넓어 주변을 잘 정비하면 좋은 사찰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서울 중심부에서 이만한 절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중앙종회도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2011년 5월말 총무원이 개발업체와 흥천사 토지 1860평에 대해  88억원에 매각하기로 계약을 체결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 논란이 일었다. 종단 내부에서 비판여론이 거세게 확산됐다. 이런 가운데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6월21일 토지매각을 전면 백지화하기로 하고, 흥천사 주지에 금곡 스님을 임명했다. 

▶스님을 주지로 임명한 것은 전격적인 결정이었다. 어떤 일이 있었나?
“그해 6월초 신흥사 조실 설악무산 스님을 찾아뵙고 종단 근황을 보고했다. 조실스님께서는 ‘흥천사 땅은 절대 팔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자네가 맡아서 정상화를 시켜보게. 낙산사를 복원한 경험이 있느니 잘 할 걸세. 자네만 믿네’라고 당부하셨다. 조실스님의 말씀을 총무원장 자승 스님에게 전했다. 자승 스님은 흔쾌히 동의했고, 조실스님과 만나 토지매각 없이 흥천사를 정상화시키기로 합의했다. 6월21일 흥천사 지원을 위한 세부내용을 종무회의에서 결의한 뒤 나를 주지로 임명했다.”

▶종무회의에서는 어떤 내용이 결의됐나?
“흥천사 정화를 위한 종단의 염원과 필요성, 정화의 어려움 등을 인정해 당대에 한해 창건주 권한을 부여하기로 했다. 향후 10년 간 일체의 감사 및 분담금을 면제하기로 했으며, 3교구 신흥사 본말사로부터 정화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다. 흥천사 정상화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배려였다고 생각한다.”

▶2005년 화재로 소실됐던 낙산사 복원불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 낙산사 복원불사로 지쳤을 법도 한데 어떻게 마음을 냈나?
“솔직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낙산사 불사를 진행하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조실스님의 말씀을 부처님 법이라 여겼다. ‘자네를 믿는다’는 조실스님의 그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흥천사 정상화를 위해서는 최소 100억원 이상의 돈이 필요했다. 이때문에 총무원에서도 사찰 토지를 매각하지 않고서는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다. 불사비용이 걱정되지는 않았나?
“그동안 설악산 봉정암, 양양 낙산사 등 많은 사찰의 복원불사를 진행해 왔다. 불사를 진행하면서 돈에 맞춰 일을 하지 않았다. 불사를 먼저 생각했고, 그러다보면 어떻게든 불사비용이 마련됐다. 물론 그 당시 주지소임을 맡으면서 흥천사 정상화 비용이 걱정되긴 했다. 그러나 사찰 재정은 신도들의 신심과 원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당장 어렵더라도 불자들의 신심과 원력을 모아낸다면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00억원의 돈은 어떻게 마련했나?
“신용대출로 40억원을 받았고, 총무원으로부터 기채승인을 받아 흥천사 토지를 담보로 은행에서 60억원을 빌렸다.”

▶돈은 어떻게 집행했나?
“전임 주지스님이 받은 16억5000만원은 5년 만에 이자가 붙어 25억원이 됐다. 사하촌 22가구 80세대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만 68억원이 소요됐다. 철거비까지 포함하면 100억원의 돈이 고스란히 들어갔다.”

▶재개발공사 때마다 원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문제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흥천사는 사하촌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이렇다 할 잡음이 없었다. 어떻게 설득했나?
“흥천사를 정상화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반듯한 도량을 만들어 어렵고 소외된 분들에게 부처님 자비를 전하는 것이다. 사찰정상화를 이유로 서민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변호사·법무사·부동산중개업자 등으로 구성된 법무팀을 꾸려 매주 2~3회 회의를 진행하며 합리적인 보상절차를 논의했다. 주민들이 이주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려고 했다. 이주비용이 예상보다 더 들어갔지만, 내가 조금 더 고생하면 된다고 마음먹었다.”
금곡 스님은 4개월여 간 사하촌 주민들과 보상절차를 마치고 2011년 10월21일 흥천사에 거주하던 스님과 사찰운영권을 이양받는 인수인계식을 진행했다. 이로써 흥천사는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50여년 만에 조계종 품으로 돌아왔다. 

▶흥천사가 조계종 관리 사찰로 돌아온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흥천사는 조선시대에 창건돼 숭유억불의 시대에도 왕실 사찰로서 그 전통을 계승한 사찰이다. 1950~60년대 왜색불교의 잔재를 걷어내고 불교정통성을 회복하려 했던 불교정화 1세대 스님들이 미처 정화하지 못한 사찰이기도 하다. 흥천사가 50년 만에 종단 관리 사찰로 돌아온 것은 불교정화 이후 세대인 설악무산 스님과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원력이 만들어 낸 제2의 불교정화라고 할 수 있다. 조계종이 서울 강북권의 포교 거점도량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주지로 부임하자마자 사찰 담장을 허물고 주민들에게 사찰 경내를 가로지르는 길을 24시간 개방했다. 이유는?
“지역주민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다. 포교와 교세확장에 목적을 둔 인위적 불사는 오히려 지역주민에게 반감을 살 수 있다. 누구나 편하게 쉬었다 갈 수 있는 쉼터와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음습했던 사하촌 낡은 집들을 말끔히 걷어내고, 담장을 허물고 누구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길을 내니 지역주민들이 찾기 시작했다.”

 

 

막대한 불사비용·은행 대출이자에도 지역주민 위한 복지사업 꾸준히 진행
“재정보다 어떻게 부처님 자비 실천할까를  먼저 고민하는 게 사찰의 역할”
맞벌이 부부 위해 어린이집 건립…주민들 신행문화공간 전법회관 신축도

 

올해 10월17일 문을 연 흥천사 전법회관 야경. 흥천사 10년 불사의 결실인 전법회관은 지역주민들의 신행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흥천사는 지역복지와 관련해서도 모범 사찰로 평가된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중단되기는 했지만 중창불사가 한창 진행중일 때도 혹서기와 혹한기를 제외하고 매년 평균 2~3차례 꾸준히 경로잔치를 열었다. 청소년 장학사업으로 매년 성북구청과 성북경찰서에 후원금을 전달했으며 2012년부터 인근 동사무소와 주변 아파트 1000세대에 커피세트 등을 선물했다. 24시간 사찰주차장을 개방하고, 등산로에 매일 생수 1000병과 커피자판기를 비치해 무료로 지원해 오고 있다. 중창불사가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공사인부들에게 매주 5만원의 격려금도 별도로 지원했다. 선물과 격려비 등으로 지원된 돈만 3억원이 넘을 정도다.  

▶중창불사 비용과 은행이자를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했을 텐데 지역복지 사업까지 진행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나?
“신흥사 조실 설악무산 스님은 늘 ‘이웃을 부처님처럼 섬기라’고 당부하셨다. 그것은 사찰이 존립하는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 어른을 공경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나눔을 실천하면 불사는 저절로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려운 사찰재정을 생각하면 당시 지역복지사업이 무리일 수 있었다. 사찰종무원들과 대중스님들도 만류했다. 그러나 물질적인 부분을 먼저 고려하면 자비를 실천할 수 없다. 재정적인 걱정을 하기 보다는 어떻게 자비를 실천할 것인가를 우선 고려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부정적인 걱정이 앞서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십시일반 나누고 마음을 모으면 결국 그 힘으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흥천사는 2012년 7월, 대방(관음전) 복원불사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시작했다. 창건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그해 9월23일 처음으로 신덕왕후 다례재를 봉행한 데 이어 이듬해 9월14일 1년여의 공사 끝에 전통 한옥양식의 ‘삼각선원’을 개원했다. 2015년 5월에는 경내에 서울시 최초로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한옥식 친환경 어린이집도 개원했다. 
 

흥천사가 맞벌이 부부들의 보육을 위해 2015년 건립한 느티나무 어린이집.
넓게 트인 전법회관 무량수전 전경.
24시간 기도공간인 약사전.

▶우선적으로 해야 할 불사가 많았는데 어린이집부터 건립한 이유는 뭔가?
“흥천사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둘러쌓인 사찰이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부분 젊은 맞벌이 부부들이고,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보육이다. 종교를 떠나 지역주민들의 불편을 덜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어린이집에는 종교가 다른 가정의 아이들도 다닌다. 아이들이 사찰 경내에 있는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불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커지는 것을 느낀다.”

▶어린이집을 친환경 한옥양식으로 건립한 이유는?
“처음 어린이집을 건립할 때 아이들 건강을 먼저 생각했다. 요즘 아이들은 환경오염으로 아토피 등의 질환에 힘들어 한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옥은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다. 정서적으로 따뜻함과 안정감을 준다. 전통사찰 내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건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환경 한옥으로 건립된 ‘흥천사 느티나무 어린이집’은 그해 10월 국토해양부가 선정하는 ‘올해의 한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신식 시설을 갖춰 지역에서 인기도 높다. 
흥천사 중창불사는 국가등록문화재 583호 대방과 서울시 유형문화재 66호 극락보전에 대한 해체복원으로 본격화됐다. 이런 가운데 금곡 스님은 전법회관 건립을 발원하고 대작불사에 착수했다. 

▶대방과 극락보전 해체복원도 만만치 않은 불사였다. 그런 와중에 전법회관 건립을 추진한 이유는 뭔가?
“흥천사 극락보전과 대방은 공간이 협소했다. 많은 불자들이 기도와 법회를 진행하기에 너무나 부족한 공간이었다. 마땅한 공양간도 없어 비닐하우스에서 공양하는 신도들을 볼 때면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쾌적한 신행문화공간을 마련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법회관 불사는 몇 년 뒤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신도들을 위해 계획을 앞당겨 진행했다.”

▶전법회관 건립불사를 진행하기 위해 종단에 또 기채승인을 신청했다. 얼마나 한 것인가?
“처음에는 80억원을 예상했지만 공사과정에서 추가비용이 발생해 130억원이 필요했다. 은행에서 100억원을 대출 받았고, 30억원은 신도 모연으로 충당했다.”

▶앞서 대출 받은 돈까지 합치면 230억원이 훌쩍 넘을 것 같다. 한 달 이자비용만 얼마나 드나?
“흥천사 중창불사에 소요된 총불사금만 350억원에 달했다. 대출금 일부를 상환해 현재 남은 대출금이 175억원이다. 매월 이자가 3500만원이고, 원금도 2000만원씩 상환하고 있다. 향후 20년 내에 대출금을 모두 갚을 계획이다.”
2017년 착공한 흥천사 전법회관은 3년여의 공사 끝에 올해 10월17일 문을 열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전법회관은 신도들의 편의에 초점이 맞춰졌다. 지하공간에는 선망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지장전이 마련됐으며, 1층에는 식당과 종무소, 2층에는 초하루 및 일요법회, 문화공연 장소로 활용되는 무량수전이 들어섰다. 법당을 가르는 기둥이 없어 넓게 트인 무량수전은 1000여명의 신도들이 법회를 진행할 수 있다. 2층 무량수전 옆 공간은 여가시간을 활용해 독서와 차를 즐길 수 있는 북카페를 조성했다. 60평 규모의 다목적 공간도 따로 마련해 평일에는 주민들을 위한 교양강좌가 진행되고, 일요일에는 어린이·청소년 법회 공간으로 운영된다. 삶의 무게에 지치거나 병으로 고통 받는 신도들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인 약사전은 지상 3층에 마련됐다. 전통한옥 양식으로 건립된 약사전은 24시간 기도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아픈 마음을 달래고, 새로운 원력을 세울 수 있는 흥천사의 희망공간이다. 

▶전법회관 지하 1층 지장전은 많은 신도들이 한꺼번에 선망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공간이다. 제사 공간에 신경을 많이 쓴 이유는?
“과거에는 할머니나 부모의 손에 이끌려 절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불연이 맺어졌다. 그러나 핵가족화 되고 맞벌이 부부가 많은 현대에는 불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실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면 어린 세대들이 불연을 맺는 기회도 늘어날 것으로 본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제사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향후 사찰이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다.”

▶또 어떤 불사를 계획하고 있나?
“흥천사 삼각선원에는 현재 비구니스님들이 정진하고 있다. 앞으로 공간을 확대해 20~30명의 비구니스님들이 부담 없이 정진하면서 포교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고 싶다. 대만 불광산사가 오늘날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구니스님들의 역할이 컸다. 비구니스님들은 대중친화력이 높고, 섬세하다. 그분들이 제 역할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한국불교도 크게 바뀔 수 있다고 본다.”

▶불자들에게 흥천사가 어떤 사찰로 기억되길 바라나?
“흥천사는 도심사찰이고, 주민들과 함께 하는 사찰이다. 멀리서 바라만 봐도 좋고, 언제든지 가보고 싶고, 그곳에 가면 따뜻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언제나 희망을 가꿀 수 있는 그런 도량이길 바란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59호 / 2020년 11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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