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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제39칙 설봉남제(雪峰南際)

설봉이 여인의 절을 한 까닭은

여인처럼 절하는 설봉 모습에 
의도 파악한 남제는 “예, 예!”
두 사람이 헤어진 그 자리엔 
이심전심외엔 아무 것도 없어

설봉(雪峯) 화상이 남제(南際) 장로를 배웅하러 나서서 여인처럼 절을 하였다. 남제가 손을 모으고 말했다. “예, 예!” 그러자 설봉이 이마에 손을 얹더니 곧장 돌아섰다.

일찍이 남제장로가 설봉을 방문하였다. 그러자 설봉은 남제장로를 현사사비에게 보냈다. 현사가 물었다. ‘고인은 깨침의 소식은 나만이 안다고 말했다. 장로는 어찌 생각하는가.’ 남제가 말했다. ‘그 깨침의 소식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현사사비는 설봉의존의 문하인이다. 남제장로가 가르침을 설봉에게 청했을 때, 설봉은 현사사비에게 보냄으로써 서로 맞장을 뜨도록 하였다. 이에 현사가 깨침의 소식에 대한 문답을 꺼내자, 남제는 깨침의 문제에 대해서조차 집착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것으로써 설봉과 현사는 남제의 선기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여기에서는 이제 남제가 설봉을 찾아와서 머물다가 떠난다고 말하자, 설봉은 친히 배웅을 나갔다. 그런데 설봉은 일반적인 모습처럼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인처럼 절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세간의 상식으로 보자면 남자인 설봉이 여인의 절을 하는 것이 신선했을 것이다. 그에 대하여 남제장로는 전혀 의아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설봉의 의도를 백퍼센트 이해하고 수긍하였다. 그에 대한 반응이 바로 ‘예, 정말로 감사합니다.’라는 답변이었다. 설봉이 여인의 절을 한 것은 바로 설봉의 처소에서 공부한 내용을 잘 보림(保任)하라는 의미였다. 남제는 설봉의 친절하고 자상한 가르침을 충분히 받아들였고 이후로도 잘 보림한다는 답변으로 정말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자 설봉은 자신의 의도가 남제에게 읽혔음을 알아차리고는 이마에 손을 얹고는 ‘아차’ 하였다. 그러나 조금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설봉은 짐짓 그리고 애써 그와 같은 행위를 취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자리에는 설봉과 남제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설봉은 자신이 한 수 당했다는 투로 자신의 이마에다 손을 갖다 댔지만 그 의미를 알아차린 사람은 누구였을까. 설봉과 남제의 이심전심 이외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설봉은 자신의 행위를 남제가 이해한 것에 대하여 속으로 누구보다도 기뻐하였다. 역시 현사와 주고받은 문답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행위로써 설봉은 남제의 선기를 한껏 추어주면서 조실로 돌아간 발걸음은 사뭇 가벼웠다.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배웅할 때는 각자 자신의 깜냥에 따른 정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서운하지 않고 즐거운 만남으로 기억된다. 설봉이 남제에게 보여준 배웅의 자세가 여인처럼 다소곳한 자세로 표현되었던 것은 썩 세련된 모습이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다 알을 부화해두고 그것이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애지중지 보살펴주는 호념의 모습이다. 남제는 이제 자신의 몫이 남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설봉이 보여준 몸의 태도에 대하여 긍정의 자세를 언설로 드러내었다. 이것이야말로 설봉의 은혜를 입고 자신의 허물을 벗어버린 응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 이후에야 바로 이전의 미혹했던 시절의 방황을 탈탈 털어버리고 하루일과가 끝나고 아늑한 집에 돌아온 것처럼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이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상사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법거량(法擧量)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 사이에서 만남과 이별의 감정처럼 의외성에서 오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부러 초청하지 않았는데 문득 지음이 찾아온다는 것은 반갑기 짝이 없다. 그리고 아쉬운 만남을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시간에도 애써 배웅하는 심정이야 항상 느껴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차를 나눈 뒤에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와서 아직도 찻잔에 남아 있는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키는 맛이란 짜릿한 경험이기도 하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59호 / 2020년 11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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