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7.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57)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⑪ (4) ‘중대’왕실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출자관념(出自觀念) - 상

김춘추·김유신 연합세력에 의해 ‘중대’ 라는 새로운 시대 개막

‘중고’ 왕실 실세로 등장한 용수의 권력, 아들 김춘추에게 승계
용수·춘추 부자와 선덕여왕·진덕여왕 대립관계 설정은 사실무근
대당 외교 주도 김춘추, 김유신 도움으로 정치문화 대대적 개혁 

국보 25호 태종무열왕릉.
사적 20호, 태종무열왕릉비(귀부와이수).출처=문화재청

27대 선덕여왕대(632~647)와 28대 진덕여왕대(647~654)는 귀족연합 지배체제로 국왕권력이 약화된 반면 종교적 신성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선덕여왕대는 왕실 최고원로인 을제(乙祭)가 섭정을 담당하고, 상대등 수품(水品)과 내성사신 용수(龍樹) 및 서불한(이벌찬) 사진(思眞) 등이 주도하는 과두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선덕여왕 말년 상대등 비담(毘曇)의 반란을 계기로 주도세력이 바뀌어 진덕여왕대는 상대등 알천(閼川)을 대표로 임종(林宗)・술종(述宗,竹旨아버지)・무림(武林,慈藏아버지)・염장(廉長)・유신(庾信) 등이 참여하는 귀족회의(和白) 형태로 정국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비담의 난 진압과 백제와의 전투에서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 당과의 외교경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김춘추 등 2인에게 실권은 넘겨지고 있었다. 결국 이들에 ‘중대’라는 새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런 점에서 진덕여왕대는 ‘중고’에서 ‘중대’로 시대가 바뀌는 과정에서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 매부 사이였고, 장인 사위이기도 하는 등 중첩된 인척관계를 맺었다. 그러므로 ‘중대’왕실의 기반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춘추와 김유신 두 사람의 인척관계와 정치적 성장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김춘추의 아버지 용수는 25대 진지왕의 아들이었다. 진지왕은 재위 4년 만에 귀족회의에 의해 폐위되어 사망하고, 용수는 유복자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수는 4촌형제 사이인 진평왕의 보호를 받아 왕궁에서 성장하면서 측근 가신으로 활약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용수는 진평왕의 딸이자 5촌 당질 관계인 천명부인(天明夫人)과 결혼함으로써 진평왕의 사위이자, 선덕여왕의 제부가 됨으로써 진평왕 직계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용수와 천명부인의 소생인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이질관계가 됨으로서 이들 사이의 신분 차등은 상정하기 어렵다. 진평왕-선덕여왕 부녀와 용수-김춘추 부자의 신분 관계를 성골과 진골로 구분하여 골품의 차등을 이해하려는 학자 가운데는 천명부인이 진평왕의 정비인 마야부인의 소생이 아닐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편의적인 사료 해석일 뿐이다. ‘삼국유사’ 왕력조에서는 진평왕의 부인으로 선비(先妃) 마야부인김씨(摩耶夫人金氏)와 후비(後妃) 승만부인손씨(僧滿夫人孫氏) 등 2인이 기록되어 있는데, 선비와 후비의 구분은 선비가 사망한 뒤 후비를 새로 맞아들인 것으로 계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며, 김씨와 손씨 등 성씨의 구분은 성씨 자체가 후대에 붙인 것이기 때문에 신분구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더욱이 천명부인이 선덕여왕과 어머니를 달리하는 이복자매 관계였다는 기록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분상 차등을 설정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두 가계 사이의 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진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인물들과 사실을 설명하는 자료가 전승되고 있는 반면, 성골에 대해서는 자료가 전해지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진골과 달리 성골은 실체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을 수 없다. 성골은 신분체제나 사회제도의 문제가 아니고, 종교나 정치사상의 문제로의 발상전환이 요구되는 주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진평왕의 측근 가신과 ‘중고’왕실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던 용수가 정치권력의 한축으로 등장한 계기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의 임명이었다. 진평왕 44년(622),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 등 3궁을 통합 관리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에 용수가 임명되면서 정치권력의 실세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때 용수 나이는 44세 전후의 장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지증왕대(500~514)부터 6부체제는 해체되기 시작해 6부 가운데 탁부(啄部, 뒷날의 梁部)와 사탁부(沙啄部, 뒷날의 沙梁部)가 주도하는 2부체제로 바뀌어 갔다. 지증왕 4년(503) 사탁부 소속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이 주관한 7인회의는 탁부 2인, 사탁부 3인, 본피부 1인, 사피부 1인으로 구성되었으며(영일 냉수리비), 다음 법흥왕 11년(524) 탁부 소속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법흥왕)이 주관한 14인회의는 탁부 6인, 사탁부 6인, 잠탁부 1인, 본피부 1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주목되는 점은 국왕의 동생인 사부지(徙夫智,立宗)갈문왕이 사탁부 소속으로 국왕 다음 서열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울진 봉평비).

그런데 법흥왕 18년(531) 상대등이 설치된 이후 국왕은 초월적 지위로 상승하면서 소속부를 더 이상 관칭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여타 귀족은 예외 없이 소속부를 관칭하고 있었는데, 진흥왕 29년(568) 진흥왕의 마운령 지역 순수에 수행한 대등(최고귀족회의구성원)의 명단에는 탁부 6인, 사탁부 1인 등 7인이 기록되어 있어 완전히 탁부와 사탁부 중심으로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진평왕대에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중앙의 상급 행정관서의 장관・차관 등 관리직에 해당하는 최고관직이 모두 2인씩 설치되었던 것도 탁부(양부)와 사탁부(사량부) 주도의 이부체제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진평왕 7년(595)에는 국왕의 궁궐인 대궁과 함께 양부(탁부)의 양궁, 사량부(사탁부)의 사량궁 등 세 곳에 각각 사신(私臣)을 두어 관리케 하였다. 추측컨대 양궁과 사량궁은 진평왕의 친동생들인 진정갈문왕(伯飯)과 진안갈문왕(國飯)이 각각 주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진정갈문왕은 선덕여왕의 배우자로 추정되며(武田幸男), 진안갈문왕의 딸인 진덕여왕은 사후 사탁부에 장사지냈던 사실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평왕 44년(622) 용수를 내성사신에 임명하여 3궁을 통합 관리케 한 것은 양부와 사량부를 국왕 중심으로 완전 통합시킨 것이고, 용수가 왕실권력을 관리하는 실세로 등장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때 갈문왕으로 책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원년조에서는 용수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한 사실을 전하는 반면, ‘삼국유사’ 왕력 태종무열왕조에서는 각간(角干) 문흥갈문왕이었던 사실을 전하고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대 이후에는 43대 희강왕대의 충공(忠恭)갈문왕 한 예를 제외하고는 ‘갈문왕’ 대신에 ‘대왕’ 칭호만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태종무열왕이 즉위하면서 갈문왕을 대왕 칭호로 바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궁・양궁・사량궁 등 3궁의 통합 관리를 담당한 내성은 장관인 사신(私臣) 1인을 비롯해서 차관직인 경(卿) 2인, 감(監) 2인, 대사(大舍) 1인, 사지(舍知) 1인 등 5등관제로 구성되어 상급의 중앙 행정관서와 같은 구조였다. 뿐만 아니라 내성 관할에는 왕실 소속의 100여개의 궁정기구들이 소속되어 커다란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장관인 사신은 관등이 금하(衿荷)에서 태대각간(太大角干)까지로 규정하였으며, 임기제한도 없었고, 병부령을 겸직할 수 있었다. 사신이라는 명칭은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의 별칭인 상신(上臣)에 대응되는 것으로써 상대등이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관직이었다면, 사신은 왕권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은 직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등은 일왕일대(一王一代)로 국왕과 임기를 같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삼국사기’에서 임면사실을 거의 빠짐없이 기록한 반면, 사신은 초대인 용수와 애장왕대의 김언승(金彦昇)의 임명 사실 이외에는 일체 기록이 누락되었는데, 왕실의 사적성격의 직책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신의 이러한 사적 성격은 진덕여왕 5년(651) 설치되어 중앙 행정관서들을 관할하는 집사부중시의 공적인 성격과 확실하게 대조된다.

한편 용수는 진평왕 51년(629) 8월 대장군으로서 서현(舒玄)-유신(庾信) 부자와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청주)을 침공하여 대승을 거둔 적이 있었다, 용수는 선덕여왕대의 과두체제에서 더욱 영향력을 확대하였는데, 선덕여왕 4년(635) 10월 이찬 수품(水品)과 함게 지방의 주(州)・현(縣)을 두루 돌며 위문하였다. 그리고 3개월 뒤에 수품이 상대등에 임명됨으로써 2인은 각각 상대등과 내성사신으로서 귀족을 대표하고, 왕실을 관리하는 정치권력의 실세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선덕여왕 14년(645) 3월 용수는 황룡사 9층목탑의 조성공사를 주관하여 1년 만에 준공하였는데, 학계에서는 자장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공사의 인적 물적 자원을 조달하고, 관리 감독한 인물은 내성사신인 용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실의 커다란 불사는 내성에서 주관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는데, 뒷날 경덕왕 13년(754)의 황룡사대종과 혜공왕 7년(771)의 성덕대왕신종의 조성, 경문왕 12년(872)의 황룡사9층탑의 중창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황룡사9층탑의 공사 중인 11월에 상대등이 이찬 비담으로 교체되었고, 2년 뒤인 선덕여왕 16년(647) 정월 비담 등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용수는 이즈음 68~69세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용수의 권력은 아들인 김춘추에게 승계되어 이후 진덕여왕대의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는데, 학계에서는 용수-춘추 부자를 선덕여왕-진덕여왕과 대립한 반왕파로 분류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들은 ‘중고’왕실의 일원으로서, 친왕파의 중심적인 인물로서 두 여왕을 떠받들면서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더욱 키워갔던 것이다.

용수의 아들인 김춘추(603~661)를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케 한 것은 선덕여왕 11년(642) 8월 사위 품석(品釋)이 도독으로 있던 대야성(大耶城,합천)이 백제군에게 함락당한 사건이었다. 김춘추는 원한을 갚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김유신의 1만 결사대의 도움으로 겨우 생환할 수 있었다.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 김춘추는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진덕여왕 원년(647)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이어 2년(648) 겨울 당에 가서 당태종과 나당군사협정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김춘추는 협정체결에 앞서 먼저 국학에 가서 석전과 강론을 참관함으로써 당태종의 호감을 샀으며, 체결 뒤에는 당나라 장복(章服)제도에 따를 것을 요청하는 문화외교를 병행하였다. 그리고 데리고 간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숙위(宿衛)로 남겨놓아 친당정책의 지속을 보장하였다. 그때 문왕의 나이는 그 형인 법민(626~681)과 인문(629~694)의 나이로 미루어 볼 때, 18세를 넘지 못하는 소년이었을 것이다. 

김춘추는 귀국한 이후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지원으로 정치와 문화 양면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진덕여왕 3년(649) 당의 의관제도 채용, 4년(650) 진골의 아홀(牙笏) 착용과 당 연호인 영휘(永徽) 사용, 5년(651) 신년 하례식 거행, 집사부를 비롯한 중앙 행정관서의 대대적인 정비 등의 개혁을 통하여 사실상 ‘중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국내의 개혁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대외적으로 당에 매년 사신을 파견하는 가운데 진덕여왕 4년(650)에는 첫째 아들 법민을 보내어 진덕여왕 명의의 오언태평송(五言太平訟)을 바치고, 5년(651)에는 둘째 아들 김인문을 보내어 숙위케 하는 등 즉위 직전까지 친당정책을 주도하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59호 / 2020년 11월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