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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가을

  • 법보시론
  • 입력 2020.11.09 13:26
  • 수정 2020.11.12 18:24
  • 호수 1560
  • 댓글 1

설악산에만 단풍이 든다면 그것은 가을도 아니다. 때가 되면 아무 데서나 단풍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가을이다. 도심 한복판의 서울 남산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만추(晩秋). 남산은 지금 만산홍엽(滿山紅葉) 그 자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남산이 지척에 있다는 게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남산 둘레길을 무작정 걷는다. 마음의 때는 벗고 다리의 근육은 알뜰하게 챙기는 나만의 행선 수행이다. 코스는 거의 일정하다. 장충단공원의 수표교를 지나 국립극장까지 올라간 다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산 케이블카 정거장까지 걷다가 되돌아온다. 더러 남산 도서관을 끼고 둘레길 한 바퀴를 도는 날도 있지만 아기자기한 걷는 재미가 덜한 것 같아 망설이게 된다. 내 걸음걸이로는 1만5000보 정도로 대략 왕복 두 시간 거리다. 아랫배가 나올 나이가 지났으나 아직 그다지 보기 싫지 않은 것도 모두 걷기 덕분이다.

남산 둘레길을 가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여럿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중년의 선남선녀들이 있는가 하면, 쉼 없이 가을의 정취를 카메라에 담는 사진동호회원들도 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남녀커플도 있고, 길고양이들에게 때맞춰 먹을거리를 보시하는 가슴 따뜻한 자비보살도 있다. 때로는 마음이 무겁고 안타까운 장면과도 맞닥트려야 한다. 산책로 중앙의 안내 블록을 따라 더듬이를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재촉하는 시각장애인들을 목격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팔짱을 교환하는 부부들도 있지만 혼자서 힘겹게 걸어가는 시각장애인들이 더 많다. 그분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다. 업과 윤회. 도대체 생사윤회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본다. 멈칫했지만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다. 다시 야트막한 고갯길을 두어 번 오르내리다 보면 머리 위로 케이블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반환점인 명동 입구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잠시 숨을 고르다가 지나왔던 길을 문득 되돌아본다. 필동 쪽 남산은 마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두 손으로 울긋불긋한 치맛자락을 펼친 채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이다. 옛날 양반집 규수의 고운 자태를 닮았다. 올 때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갈 때는 경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복원된 성곽과 운치 있는 계단들은 보는 눈맛을 더해준다. 둘레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개울물과 작은 연못을 본떠 만든 물웅덩이는 얼마나 앙증맞고 예쁜지. 이 산책로는 산벚꽃나무와 단풍나무가 마주 보며 짙은 숲을 이루고 있어 걷기만 해도 저절로 힐링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가끔 삐딱하게 날아가는 산비둘기를 무심하게 쳐다보는 것도 재밌다.

오랫동안 사회적 두통거리였던 코로나19가 한풀 꺾이는 모양새다. 인적이 드문 먼 산의 가을이 그립다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가까운 남산의 가을이라도 한번 걸어보시기를. 혼자 중얼거리며 걷다보니 어느새 국립극장 정문이다. 동대입구역 방향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다. 이 구간은 은행나무 가로수길이다. 산란을 위해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하는 연어들처럼 늙은 은행나무는 성년이 된 자식들을 울면서 출가시키고 있었다. 보도 위에는 벌써 낙엽이 되어버린 어제의 은행잎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미끄러워서 자칫하면 엉덩방아를 찧을 것만 같다. 
두 시간 남짓한 남산 가을걷기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후두둑 빗소리가 들렸다.

멍 때리며 걷던 나는 화들짝 놀란다. 우산을 챙기고 나왔을 리 만무할 터. 봄비는 맞아도 좋으나 가을비는 꼭 우산을 쓰라고 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설마 ‘가을비 우산 속’이라는 노래가 그 대답은 아닐테고. 어느새 11월이다. 입동도 지났다. 나무도 사람도 한 해를 갈무리해야 할 시간. 좋았던 것은 좋았던 것대로 또 그렇지 않았던 것은 그렇지 않았던 것대로 마음속 김칫독에 푹 묻어버리기로 했다.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60호 / 2020년 11월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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