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2. 견여래(見如來) 게송

기자명 현진 스님

형색이나 음성으로 여래를 찾지 말라

육근경계 머물러 수행하는 건
삿된 것이라 여래를 볼 수 없어
법 상태에서 붓다 봐야 하나니
깨달음의 눈으로만 여래 보여

제26분에서 부처님께선 수보리에게 32상만으론 여래를 뵐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키고는 그 마지막에 “만약 형색으로 나를 찾으려거나 음성으로 나를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일 뿐이니 결국에도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니라”는 게송을 일러주신다.

‘금강경’에서 강조되어 반복되는 내용 가운데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보석으로 영원토록 여래께 보시하는 공덕보다 ‘금강경’의 최소한 한 수의 사구게송을 다른 이에게 일러주는 그 공덕이 더 크다’는 말이 있다. 

물론 여기서의 ‘사구게송’이란 앞서 밝혔던 바와 같이 단지 위와 같은 게송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담아낸 하나의 온전한 문구임을 가리킨다.

비록 구마라집 스님의 한역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현장 스님의 한역본과 범어 콘즈본에는 게송 바로 앞부분에 ‘모든 겉모양(相)이 온전히 갖추어졌다는 것만으론 여래라 할 수 없나니, 여래란 응당 겉으로 드러난 모양과 아울러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모양이 온전히 갖추어진 분을 일컫는 말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앞서 제5 여리실견분의 ‘약견제상비상직견여래(若見諸相非相則見如來)’를 일반적인 해석처럼 ‘만약 모든 상(相)을 상(相)아닌 것으로 본다면…’이 아니라 ‘만약 모든 상(相)인 것과 상(相 아닌 것을 볼 수 있다면 곧 여래를 보게 된다’라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한 내용 아래에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축약하여 읊은 것이 ‘견여래 게송’인데, 형색[色]이나 음성[聲]으로 여래를 찾지 말라는 것은 곧 육근경계로 여래를 찾지 말라는 말에 해당한다. 육근경계인 와스뚜(Vastu)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지 말라거나 어떤 마음이건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금강경’ 전반에 걸쳐 서술된 주요 가르침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 아니고 삿되게 수행하는 것일 뿐이기에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여래를 뵙지 못하리라 하였다.

그런데 현장 스님의 한역본엔 한 수의 게송이 더 보이니, ‘반드시 법의 상태로 붓다를 보아야 하나니, 인도하는 스승은 법을 몸으로 삼기 때문이다. 법의 상태는 인식되지 않나니, 그래서 그것은 알 수 없다’라는 내용이다. 이 두 번째 게송은 길기트(Gilit) 필사본에도 보이기에 길기트본이 바로 구마라집 스님의 번역저본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하는 게송이기도 하다.

제26분 마지막에 연이어 수록된 두 수의 게송 가운데 앞 게송에서 형색[色]이나 음성[聲] 즉 육근경계로 여래를 찾지 말라는 말이 나오고 연이은 게송에선 붓다는 법(法)을 통해 보아야 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만약 형색[色]과 음성[聲]이 색성향미촉법인 육근경계 전체를 대표하는 표현으로 쓰인 것이 맞다면 앞뒤의 두 게송 사이에는 표면적으로 충돌하는 내용이 하나 존재하니 바로 법(法, dharma)의 문제이다. 앞 게송의 육근경계는 곧 색성향미촉법을 가리키니 그 가운데 법이 존재하고, 뒤 게송에는 드러나게 ‘법을 통해…'라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법(法)으로 번역되는 다르마(dharma)의 범위는 거의 한정되어 있지 않다고 느껴질 정도로 광범위하다. 우선 그 어원을 따져보면 다르마는 ‘부여잡거나 움켜쥐다’ 혹은 ‘유지하다’라는 등의 의미를 지닌 동사어근 드루(√dhṛ)에서 온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이 세상을 유지하게 하는 모든 것들’로 그 의미가 정해질 수 있다. 초기불교를 비롯하여 불교 내에서만도 다단하게 다르마를 분석하여 그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붓다고사 스님이 다르마를 분류하여 성전을 배우는 것을 비롯하여 진리, 삼매, 통찰지, 자연적인 현상, 고유성질, 공성(空性), 공덕, 범계(犯戒) 및 알아야 할 것 등 10가지로 언급하고 있는 것만을 보더라도 일반적인 의미의 법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앞 게송의 법(法)은 육근경계에서 마지막에 일컫는 그 법이요 뒤 게송의 법(法)은 문맥의 내용상 공(空)이나 해탈을 가리키는 말로 보아, 즉 붓다나 여래는 깨달음의 눈으로 보아야 뵐 수 있을 뿐임을 두 번째 게송으로 앞 게송의 내용을 보완해놓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61호 / 2020년 11월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