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태용 건국대 명예교수

서원과 계율을 현실의 실천으로 바꾸는 것이 불자의 길

불교는 있는 그대로 보라고 가르친 가장 쉬운 종교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시대 조건이 바뀌었는데도
옛 조건 속 말씀을 시대 맞게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

‘불자는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기도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대답을 할수도 있겠지요. 하지마 어찌보면 이것은 비불교적인 대답이 될 수 도 있습니다.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부처님께서 ‘대기설법’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는 가장 일반적으로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대기설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 주어진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 말씀을 하셨을 때의 조건과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의 조건이 그야말로 천양지차입니다. 중생의 사는 환경도 다르고 출가자의 조건도 변했습니다. 출가자와 재가자의 조건도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조건과 상황에서 설하신 말씀을 지금 그대로 적용하려 든다면 불교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중 이 시대에 맞는 것을 취사선택하지 않으면 불자는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경전만 들여다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불자가 어떤 것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경전에 있는 것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하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주신 방편을 우리는 거꾸로 쓸 수도 있습니다. 시대에 어긋나는 이상한 해석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의 제목 ‘불자는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에 앞서 ‘나는 불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삶을 산다’라고 질문에 대답하는 불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심하게 이야기해서 불자의 상당수는 ‘이중생활자’입니다. 절에 가면 건실한 불자죠. 그런데 세속에 돌아가는 순간 불교는 다 잊습니다. 불교적인 삶의 원칙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불자로서 다른 종교인들과 다르게 이렇게 산다’고 내세울 삶의 원칙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요. 

여기 계신분들도 강연이 끝나면 사홍서원을 하실겁니다. 사홍서원은 거룩한 서원입니다. 너무 거룩해서 그런지 불단 위에 사홍서원을 모셔 놓고 갑니다. 세속에 가서는 사홍서원은 싹 잊고 삽니다. 그런데요, 여러분들의 삶을 불자답게 끌어가는 것은 서원입니다. 내가 불자인가 아니가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바로 서원입니다. 오욕의 추구가 삶을 끌고 가는가, 서원이 끌고 가는가. 

그런데 이건 좀 가혹한 물음일 수 있습니다. 그 거창한 서원이 삶을 끌고 가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럼에도 서원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내 삶을 서원이 이끌어가도록 노력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내 삶의 진정한 참된 목표, 서원을 향해 삶의 어느 만큼은 기꺼이 투자할 의지가 있느냐가 불자인지 아니지를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불자들에게 이것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사홍서원, 너무 거창하고 거룩해서 내 삶을 이끌어가기에는 아득한 서원입니다. 불자들에게 “부처 되고 싶은 분 손들어보세요”라고 하니 손드는 사람이 몇 없어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생각됩니다. 당장 부처가 된다고 생각하니 놓아 버려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아까운 생각이 들겁니다. 또 하나, 부처를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으로 느끼는 것이죠. 그런데 부처라는 것은 딴게 아닙니다. 부처되는 길은 오늘보다 나은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와 부처되는 길을 아득하게 느끼니 부처되고 싶은 사람에 손을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되는 삶이 우리의 실천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니 이중생활자가 되는 것입니다. 

불자로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계율입니다. 계율이 없는 삶은 불자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가장 기본적인 준칙입니다. 특히 오계는 가장 기본적인 다섯 개입니다. 많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지키지 않습니다. 지킬 가능성도 매우 적습니다. 불음주계만 해도 그렇습니다. 지키기가 쉽지 않고 지킬 가능성도 크지 않습니다. 하나를 지킬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되면 나머지 네 개 또한 권위를 갖고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삶의 원칙을 못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의 불교입니다. 불음주계조차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계율이 되니 나머지 계율들도 권위가 무너진 겁니다. 우리의 실천을 이끌어야 할 가장 기본인 계율조차 실종된, 삶을 이끌어가는 실천의 준칙이 사라진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불자들은 이중생활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한국불교는 표류하게 됩니다. 저는 계율을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다르게 바꾸라는 게 아닙니다. 이 시대의 청규를 정하자는 겁니다. ‘술 마시지 말라’가 아니라 ‘마약하지 말자’로 바꾸는 겁니다. 그래야 지킬 가능성이 있고, 나머지 계율들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두리뭉실 넘어가면 안됩니다.

사홍서원 역시 삶을 이끌어가는 에너지원이 돼야 합니다. 사홍서원을 불단위에 놓고 나가서는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에너지원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지 않으면 불자의 실천은 공염불이 됩니다. 사홍서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홍서원이 우리의 서원이 될 수 있도록 이시대, 나에게, 우리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는 못해도 ‘내 주변에 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돕겠다’로 바꾸는 겁니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아득하게 많은 번뇌를 어떻게 하루아침에 다 끊겠습니까. 나를 가장 괴롭히는 번뇌 딱 하나만이라도 찾아서 부처님 말씀에 대응해 해결하는 노력을 하자는 겁니다. ‘불법을 다 배우리다.’ 이것도 힘듭니다. ‘한 달에 불서 한권이라도 읽겠다’고 서원하는 겁니다. ‘불도를 다 이루리다’도 ‘나에게 맞는 수행 방편을 찾아 끊임없이 수행하겠다’라고 서원하는 겁니다. 너무 아득하고 먼 곳에서 찾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소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꾸준히 실천하고 내 삶의 실천으로 삼기 위해 고민하자는 겁니다. 우리는 사홍서원을 통해 나를 발전시키고 불국토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인데 그것은 아득한 곳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불자의 실천으로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불국토 건설입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도록 내가 기여하는 겁니다. 아득한 불국토가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자들은 모든 현실에 대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를 매번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부처님 가르침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자들이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내 실천을 통해 조금씩 불국토를 이룩하는 과정 없이 아득한 사홍서원, 지키지 못하는 오계를 통해서는 실천이 담보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불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던져야 합니다. 내가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은 무엇인가를 갈무리하고, 그것을 부처님 가르침과 비교해 서원, 내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보세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서원과 욕망이 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가 바로 연기입니다. 연기적 사유를 벗어나면 불교가 아닙니다. 욕망과 연기 또한 둘이 아닙니다. 욕망이 곧 서원이 돼야 합니다. 소유하려는 삶은 욕망의 삶입니다. 그런데 불교적 지혜가 늘어나 연기에 눈을 뜨면 남이 불행한데 내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와 이웃과 국가와 세상이 평안하지 않으면 내가 평안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삶 속에 내 가정의 문제가, 내 이웃의 문제가, 국가의 문제가 내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내 움직임이, 걸음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연계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삶이 바뀝니다. 그것이 바로 서원의 삶입니다. 의식이 증장되는 만큼 서원이 바뀌게 됩니다. 욕망이 서원으로 차츰차츰 바뀌어가는 삶이 바로 불자의 실천입니다. 

불자의 삶은 불교를 믿는 그날부터 조금씩 행복해져야 합니다. 삶이 고통이라는 것은 그것이 고통임을 알라는 뜻이지 고통을 안고 괴로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명호 가운데 하나가 ‘항상 웃으시는 이’입니다. 부처님 재세시 교단을 방문했던 사람이 ‘부처님 교단은 밝고 명랑하고 자신감에 차 있고 자비심이 넘친다’고 기록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날랜 사슴처럼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게 불교의 모습입니다. 오늘보다 나은 자신이 되어가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불자의 실천입니다. 

불교에는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어 갈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시대 불자의 몫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강의는 11월2일 서울 조계사 관음전에서 열린 ‘도반HC·법보신문 합동 정례 법회’에서 성태용 건국대 명예교수가 ‘불자는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1562호 / 2020년 11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