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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42칙 운문호병(雲門胡餅)

운문의 호떡 맛본 이 몇이나 됐을까

“부처와 조사 초월” 질문에
운문 스님 “호떡”이라 대답
찰나에 호떡 받아든 승에게
분별심은 이미 설자리 없어

승이 운문에게 물었다.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이란 어떤 것입니까.” 운문이 말했다. “호떡이다.”

본 문답은 질문한 승의 깜냥에 대하여 답한 운문의 기략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승이 자신의 역량을 기울여서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한다는 이치를 알고 있다고 전제한다. 승은 이미 자신이 답변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의기양양하여 자칫 운문의 역량을 가늠해보려는 제스처로 질문한다. 그러나 운문은 그렇게 얄팍한 기량에 속지 않는 뛰어난 선지식인 노고추(老古錐)이다. 승이 하는 질문이란 바로 제 딴에 제법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지만, 그것은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기계적인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운문은 벌써 파악하고 있다. 때문에 운문은 그와 같은 분별심을 아예 깡그리 막아버린다는 의미에서 호떡이라고 답변해준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호떡은 일상의 간식거리로서 누구나 언제나 어디에서나 손쉽게 구하여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운문은 그와 같은 호떡을 들어서, 그것도 아주 뜨거운 호떡을 골라서, 나아가서 그것도 호떡을 통째로 자르지도 않고 질문하는 승의 입에 한꺼번에 들이밀어 집어넣고야 만다. 그 찰나에 승은 호떡으로 인하여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덥썩 받아들였지만 너무나 뜨거운 까닭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온전히 뜨거운 호떡을 어떻게 토해내야 하겠는가에 집중해 있다. 그리고 호떡은 너무 크고 입은 너무 작아서 통째로 삼킬 수도 없다. 참으로 진퇴양난의 입장이다. 이런 경우에는 호떡을 내뱉어야 하겠는가 삼켜버려야 하겠는가. 일체의 다른 생각이 없이 그것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운문은 바로 이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승을 바라보고 있다. 그 상황에서 승은 달리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운문의 노림수가 바로 그것이다. 승으로 하여금 가장 효과적으로 분별심을 떼어내 주는 방식으로서 가장 일상적인 것이면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호떡 바로 그것이었다.

운문의 이와 같은 깔끔한 판결을 일락삭(一落索)이라고 말한다. 그 요체는 이미 공겁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부처님이 출세하기 이전부터 이해하고 있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분별심으로 인하여 승은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다. 때문에 운문은 그와 같은 미혹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방식으로 한 개의 호떡을 활용하여 승의 입을 틀어막아버린 것이다. 공연히 분별견해만 불러일으켜서 쓸데없이 분별식정을 초래할까 염려한 것이다. 그런데 승이 그 호떡을 조금이라도 씹어 먹으려고 한다면 벌써 어금니에 딱 달라붙어 꼼짝달싹도 못하고 만다.

당사자인 승의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도 말을 붙여볼 곳이 전혀 없다. 그것은 마치 부처님도 세상에 출현하지 않고 조사도 서래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런 경지를 누구와 더불어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고, 이러쿵저러쿵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일 수 있겠는가. 그런 긴박한 경우에 어떤 말을 해도 비방하는 말이 되어버리고 말며, 입을 열기만 해도 헛된 말이 되어버리고 말며,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도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비방의 말도 아니고 헛된 말도 아니며 사소한 말도 아닌 깨침의 말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고인은 대저 깨침이란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며 온온(穩穩)하고 침침(沉沉)하여 흡사 어둠 속에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와 같고 물속에서 물고기가 지나간 흔적과 같다고 말한다. 때문에 만약 명안종사가 아니라면 그것을 결코 엿보지도 못하고 타파하지도 못한다. 운문의 호떡을 맛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그리고 그 맛을 음미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행동을 보여주었을까. 운문이 주는 호떡 만드는 비법을 터득하여 호떡을 얼마나 팔아먹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62호 / 2020년 11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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