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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상(相) 없는 중도

‘~주의’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극단으로 향한다

중도를 걷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존재 양상
사람들이 상을 만들고 집착해 중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상에 집착하고 극단으로 향하는 것은 지적 게으름이 원인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한때 공산주의를 동경했던 버트런드 러셀이 20세기 초반 신생 소비에트연방을 방문하고 돌아와 한 이야기가 있다. 유물론자임을 자처하던 공산주의자는 날마다 “강한 의지, 애국심, 충성심으로 소비에트 낙원을 건설하자”며 지극히 유심론적인 요소만 떠들고 있었다. 반면에 공산주의자가 유심론자(관념론자)라고 조롱했던 영국인은 재화의 생산과 돈밖에 모르는 유물론자처럼 살고 있었다. ‘이념’이라는 상(相)이 만들어낸 아이러니컬한 모습을 목도한 후의 소감이었다.

유물론을 추구하는 공산사회에서 왜 사회의 문제를 물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신의 힘을 강조해야 할까? 그 반대로 기독교 전통을 가진 부유한 서구는 왜 돈밖에 모르는 속물처럼 살까? 혹시 주역(周易)의 가르침대로 어떤 현상이 하나의 극(極)에 이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반대의 극으로 향해가기 마련이어서 그럴까? 아니면 정반합(正反合) 구조를 가진 헤겔의 변증법이 옳아서 하나의 이념이 자리 잡으면 곧 그 반대되는 쪽이 생겨나 결국 합쳐지게 되려고 그럴까?

내 해석은 좀 다르다. 나는 우리가 어떤 이념의 상에 사로잡혀 고뇌하다가 그 반대 이념의 상을 받아들여 또다시 새로운 번뇌를 시작해야 하는 어리석고 가련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중도(中道)를 걷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어떤 상이 씌워져 그것에 집착하여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리 없는 중도의 길을 걷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중도가 우리의 자연스런 존재양상이지만 사람들이 상을 만들고 집착하면서 그 길에서 벗어나게 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열 사람 가운데 밥을 가장 적게 먹는 사람은 하루 한 공기, 가장 많이 먹는 사람은 아홉 공기를 먹는다고 가정하자. 이때 모두가 하루 한 공기만 먹어야 한다는 상에 빠지면 안 된다. 그 반대로 아홉 공기를 먹으라고 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두가 한 공기와 아홉 공기의 중간인 다섯 공기를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세 경우 모두 사람들에게 적거나 많은 양을 강요하게 되어 고통을 초래한다. 양극단을 피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산술적 평균을 고집해서도 안 된다. 각자의 체중과 운동량에 맞게 적절히 식사량을 조절하는 것이 중도를 따르는 방법이다.

그런데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자. 도대체 누가 위와 같이 모두의 식사량을 획일적으로 정하려 들까? 이런 식의 식사량 강요는 어리석고 폭압적이어서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다. 자연 상태의 우리는 자신에게 적절한 양만큼 식사한다. 자연에서는 우리가 이미 중도를 따르고 있다. 중도가 원래 우리에게 주어진 기본(default)이다.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신다. 해가 져서 피로하면 잠자리에 들고, 아침이 되면 일어난다. 이것들 모두가 중도다. 자연스런 상태가 중도라는 이치는 선(禪)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한국 불자들에게 물론 익숙하게 다가올 수 있겠다.

붓다는 팔정도 하나하나가 모두 중도라고 가르친다. 예를 들어 말을 바르게 하라는 정어(正語)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대에 따라 말을 적절히 하라는 중도의 가르침이다. 이 또한 우리에게 기본으로 주어진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사탕발림말만 하는 극단과 험한 말만 하는 다른 극단을 모두 경험하고 난 후에야 우리가 겨우 정어라는 중도의 길을 깨닫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경우에 따라 적절한 말을 사용한다. 연약한 어린아이들에게는 부드럽게 말하게 되고, 군인들끼리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그것이 우리 사는 모습이다. 팔정도 하나하나가 이와 같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자연스러운 중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도의 가르침이란 어떤 상에 사로잡혀 원래의 자연스런 중도의 길에서 벗어나 그 상이 지향하는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지, 먼저 극단을 경험하고 알아야 중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싯다르타가 왕자로서의 안락함과 사문으로서의 고행을 모두 경험한 후에 중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도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모든 일의 중도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싯다르타 생존 당시 사회에는 왕자는 편안히 살아야 한다는 그릇된 상이 있었고 또 반대로 사문은 극심한 고행을 통해야 깨닫는다는 잘못된 상도 있어서 그가 자의로 또 타의로 그런 상들이 주는 번뇌를 겪었을 뿐이다. 둘 다 부자연스러운 길이었다. 우리는 싯다르타의 경험을 교훈삼아 처음부터 그런 길을 걷지 않으면 된다. 붓다의 중도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는 적절함을 벗어나 모자라거나 넘치는 극단으로 가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가르침으로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연스런 중도를 벗어나 고뇌를 불러오는 상에 집착하게 될까? 왜 ‘~주의(主義)’로 표현되는 좌와 우의 상에 집착하여 사회를 분열시키고 서로 갈등으로 치닫고 있을까? 한번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해 보자. 완벽해서 변할 필요가 없었던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이 역사상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영원히 고정불변해야 할 이상적 사회구조가 단 한번이라도 존재했었던가? 대답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자신이 현재 우연히 들고 있는 이념이라는 상을 마치 영구불변의 진리요 우리사회를 이상향으로 만들어줄 만병통치약으로 착각하고 집착할까?

‘~주의’라고 불리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극단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대단히 위험하고 중독성이 강한 상이다. 나는 우리가 이런 상에 집착하게 되는 이유가 일종의 지적 게으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와 종교 같은 거대 담론은 아무나 어떤 어리석은 소리를 하고도 스스로 근사하다고 느낄 수 있는 주제들이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누구나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고 또 그런 자신의 말에 취해 그 상에 머무른다. 이렇게 쉽게 정서적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분야도 드물다. 우리가 지적으로 이런 주제들을 분석하면 그 상이 가진 많은 문제가 곧 드러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도 게으르고 또 쉬운 만족감을 포기할 의향이 별로 없다. 나는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과 번뇌가 이와 같은 게으름과 어리석음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중도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져 있다. 그런 우리를 이념이라는 상으로 유혹해 극단으로 치닫게 하여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려는 정치 종교 집단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겠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62호 / 2020년 11월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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