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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같은 할과 방으로 잠든 의식을 깨우다

  • 불서
  • 입력 2020.11.30 13:50
  • 호수 1563
  • 댓글 0

‘내일이 와준다면 그건 축복이지!’ / 이철수 지음 / 문학동네

‘내일이 와준다면 그건 축복이지!’<br>
‘내일이 와준다면 그건 축복이지!’

기후위기에 코로나19까지 유행하면서 지구촌이 움츠러들었다. 이전에도 빈곤과 차별의 고통으로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무엇보다 자유롭게 오가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일상이 어려워지면서, 비대면이라는 기이한 현실을 맞게 됐다. 생각지 못했던 이 상황이 낯설고 당혹스러운 가운데,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쉽사리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위기는 계속되고, 빈곤과 차별에 따른 고통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인간관계 또한 더 비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무에 삶과 마음을 새겨온 이철수 목판화가가 지금 이 시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림과 짧은 글로 표현하고 책으로 엮었다. ‘내일이 와준다면 그건 축복이지’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던 작가가 욕심 없이 사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나’와 ‘주변’을 함께 생각하는 의식을 되찾게 하고 소통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새겨낸 그림과 글이다.

작가는 그동안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민중판화로부터 종교적 수행과 깨달음을 담은 구도판화에 이르기까지, 자본과 물질의 격랑 속에서 흔들리는 심신을 곧게 일으켜 세우는 작품들을 발표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 그가 그간 모아두었던 연작을 묶은 책에는 마음 가는대로 그리고 새긴 작은 판화들이 실렸다. 작가의 일상과 밀착되어 있는 이 작품들에는 그가 독자에게 청하는 가장 내밀하고 소탈한 대화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저 그렇게 간단하게 보고 넘길 만큼 단순하지 않다. 판화의 크기는 작아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묵직하고 오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눈에 힘을 풀고 마음에 빈틈을 낼 때 비로소 감각되는, 그래서 당연하게 여기곤 했던 소중한 삶의 순간들이 작품마다 편편이 빛나고 있다. 자연을 골똘히 바라보면서 새삼 환기되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 자신의 힘으로 노동하고 생활을 꾸림으로써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건강한 감각이 간결하고 힘 있는 선을 타고 전해진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책의 1부 ‘맑은 마음에 비친 삶’은 작가의 예리한 성찰을 통해 바라본 세상 이야기를 담았다. 2부 ‘사물에 깃든 생각’에는 작가의 생활공간에 놓인 소박한 물건들이 깊은 사유의 단초로 등장한다. 그리고 3부 ‘일상이 곧 수행’에는 자신이 사는 동네 풍경, 가족과 이웃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일상 풍경이 눈에 보일 듯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매일매일 다양한 사람과 스쳐가고 인상 깊은 장면을 발견하는 작가의 생활 속에서 얻게 된 깨달음이 정겨운 그림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책 곳곳에서 종교와 관련해 쏟아내는 몇몇 이야기들이 옛 선지식들의 ‘할’과 ‘방’을 방불케 한다는 점이다.

이철수 작가가 작은 작품과 짧은 글을 통해 내면에 잠든, 혹은 외면해온 의식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이철수 작가가 작은 작품과 짧은 글을 통해 내면에 잠든, 혹은 외면해온 의식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일에 쫓기면서 사는 심신을, 좌선하면서 쉬게 하고 싶다는 사람들 많습니다. 단기출가, 템플스테이, 시민선방…. 마음 수행을 하다 크게 얻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느낌표! 물음표로 시작해서, 느낌표로 마무리하게 되면 좋지요. 느낌표라고 별것 있을까만….” “미물도 허물을 벗고 나서 비로소 하늘을 얻습니다. 버릴 것을 다 버리고 떠나지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허물을 쓰고도 잘 삽니다. 벗어버려야 할 껍데기에 갇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껍데기를 아까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구나 내일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것 축복 맞습니다. 하루 열심히 살고 나서 단잠을 잘 수 있으면, 그것도 축복이지요?” “무슨 십자군 전쟁도 아니고…. 종교적 배타성과 집착이 지나쳐 사람 사이를 불편하게 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남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이고, 진지하게는 타인의 신념과 자유를 침해하는 일입니다. 내면에 집중하면서 겸손하게 깊어져야 할 신앙을 길바닥으로 끌어내고 거리에서 증명하려는 태도에 실망합니다. 신앙도 조심해서 다루어야 할 가치지요?”

이처럼 작가가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들은 마치 선사들이 할과 방으로 제자들을 깨우치고 깨달음을 얻게 했듯, 그림과 글 하나하나에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혹은 알면서도 외면했던 잠든 의식을 깨우고 있다. 1만4500원.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563호 / 2020년 12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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