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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58)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⑫ (4)‘중대’왕실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출자관념(出自觀念)-중

태종무열왕 즉위는 신라를 이전과 이후 양분하는 역사적 사건

귀족연합의 과두체제에서 국왕 중심의 확고한 중앙집권 구축
대당외교 승리로 백제 정벌…태자책봉·왕위계승 안정적 성취
기존 불교식 왕명시대 벗어나 시호와 묘호에 한식제도 채용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5호.
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235호.

27대 선덕여왕대(632~647)에 이어 28대 진덕여왕대(647~654)도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연합의 과두체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에서 용수·춘추 부자는 국왕의 측근 인물로서 착실하게 정치권력을 강화해 가고 있었다. 먼저 선덕여왕대 용수는 26대 진평왕의 사위이자 여왕의 제부로서, 그리고 왕궁과 왕실의 관리 책임을 맡은 내성사신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실추된 여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국가적인 불사로써 국가불교를 대표하는 자장과 함께 황룡사의 9층목탑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인 김춘추는 진평왕의 외손자로서 진덕여왕대의 대당외교를 주도하는 한편, 군사권을 장악한 처남이자 정치적 동지인 김유신과 연합하여 국내의 정치와 문화 양면의 개혁을 추진하여 권력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그 결과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은 채로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이어받아 29대 태종무열왕(654~661)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왕위 계승과정에서는 다소의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5 태종무열왕 즉위년조에서는 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群臣)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요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나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 될 만합니다.’ 마침내 춘추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그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 자료는 김춘추 측에 의해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다소의 윤색이 없지 않지만, 당시의 정치 분위기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내용이다. 이 내용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것은 진덕여왕이 후계자가 결정되지 못한 상태로 사망하자, 여러 산하들, 곧 최고 귀족들의 회의(和白회의)에서 논의한 결과 알천을 섭정(攝政)으로 선출하였다는 사실이다. 알천은 일찍이 선덕여왕 전반기 대장군의 직책을 맡아 백제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운 바 있으며, 진덕여왕이 즉위한 이래 상대등이 되어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산 우지암에서의 6인 최고귀족회의에 관한 설화는 알천이 수석의 자리에 앉았으나, 군사적 실권은 이미 김유신에게 넘어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결국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후계 국왕을 선정하지 못한 채로 과두체제의 연장을 희망하던 귀족들은 그 공동지배체제의 임시 관리자로서 우선 알천을 섭정으로 선임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정치와 외교 양면의 권력을 주도하고 있던 김춘추와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유신 등의 위세에 압도되어 알천은 사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국왕의 자리까지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춘추가 국왕으로 추대를 받자 3번의 사양 끝에 수락했다는 것은 느긋한 여유로움을 보여줄 수 있을 만큼의 자신이 넘쳤다는 사실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654년 즉위 당시의 그의 나이는 52세로서 산전수전의 경험을 다 겪기에 충분한 때였다.

김춘추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왕위 교체로 그치는 사건이 아니었다. 992년 동안의 신라의 전 역사를 그 이전과 이후로 양분하는 역사의 대사건이었다. 정치적·문화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분기점이 되었다. 우선 정치면에서 과도체제를 불식하고 강력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였으며, 지배체제의 운영원리로써 유교를 새로 채용함으로써 그 이전의 정치와 불교가 혼합된 제정일치적인 형태의 고대적인 잔재의 여운을 상당히 청산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다 같이 28대 진덕여왕에서 29대 태종무열왕으로의 교체를 왕통(王統)의 변화로 인식하여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의 교체를 주요 요인으로 지적하였으며, 그에 근거하여 오늘날의 학계에서도 성골에서 진골로의 변화 의미를 추적하는 노력을 집중하여 왔다. 그 결과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정교한 이론들을 다양하게 계발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주장도 실제적인 사실들과는 부합되지 못하는 상상의 공허한 주장만을 남발하는데 그치었다. 그러나 앞에서 누누이 지적하여 온 바와 같이 진평왕·선덕여왕 직계의 혈통과 용수·김춘추 계통의 신분에서 어떠한 차등을 발견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도 결코 대립 갈등의 관계이기는커녕 오히려 밀착된 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이점에서 성골과 진골의 신분 문제의 이해에는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며, 나아가 구체제와 사상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는 역사적 변화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 과제가 주어진 것이다.

태종무열왕은 즉위한 이후 제일 먼저 자신 가계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강구하였다. 원년(654) 4월에 죽은 아버지 용수(춘)를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하고, 진평왕의 딸인 어머니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삼았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 태종무열왕조에서는 진지왕의 아들 용춘을 ‘각간 문흥갈문왕(角干 文興葛文王)’으로 전하고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용춘이 생전에 이미 갈문왕으로 책봉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태종무열왕이 즉위하면서 갈문왕으로 책봉된 것을 ‘삼국사기’에서 대왕으로 칭호를 바꾸어서 기록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나는 잠정적으로 진평왕의 두 형제들이 갈문왕으로 책봉된 것과 같이 사촌 형제 사이인 용춘도 갈문왕으로 책봉되었는데,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여 갈문왕 칭호 대신 대왕 칭호로 바꾸었던 것으로 보고자 한다. 태종무열왕 이후는 거의 모두 갈문왕 대신에 대왕 칭호가 사용되었던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으며, 대왕 칭호로 바꾼 것은 이전시대와 구분하려는 의지의 소산으로 본다. 그리고 이어 다음해(655)에는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책봉하고, 나머지 여러 아들들에게 각각 관등을 수여하였다. 앞서 ‘중고’시기의 6명의 왕 가운데 생전에 태자를 책봉한 예로는 진흥왕이 맏아들 동륜을 태자로 책봉하였던 사실을 들 수 있으나, 일찍 사망함으로써 실제로 왕위가 계승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태종무열왕 때의 태자 책봉과 왕위계승은 사실상 최초의 예가 될 것이며, 이후 ‘중대’의 왕위계승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명부인 사이에는 7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그밖에 서자 3인과 딸 5인이 있었다. 그 가운데 적자 7인은 맏아들 법민을 비롯하여 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인태(仁泰)·지경(智鏡)·개원(愷元) 등인데, 이들은 모두 삼국통일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있었다. 또한 대당외교에 참여한 인물로는 법민·인문·문왕 등인데, 특히 인문은 대당외교를 전담하다시피하여 일곱 번 당에 갔었고, 당에 체류한 기간이 무릇 22년이나 되었다, 더욱 이들은 중요한 관직을 맡기도 하였는데, 법민은 병부령, 문왕과 지경은 중시(시중), 개원은 상대등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자인 거득영공(車得永公)도 재상을 역임한 것으로 전해진다. 5인의 딸들은 김품석(金品釋)·김음운(金歆運)·김유신(金庾信) 등의 부인이 되었는데, 전 2자는 삼국통일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하였고, 특히 김유신은 외3촌의 관계로서 중첩적인 결혼을 통하여 태종무열왕과 인척 관계이자 정치적 동지로서 ‘중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두 주역이 되었다. 그밖에 원효와 결혼한 요석궁주는 태종무열왕의 누이동생인지 딸인지 분명하지 않다.

한편 태종무열왕은 즉위년 5월 이방부령 양수(良首) 등에게 명하여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가다듬어 법령을 정비케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인사를 단행하여 이찬 금강(金剛)을 상대등, 파진찬 문충(文忠)을 중시로 삼아 체제를 정비하였다. 5년(658)에 문충 대신에 자신의 아들인 문왕을 중시로 삼아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이어 6년(659) 8월에는 병부령 2인 이외에 새로 1인을 증원하여 아찬 진주(眞珠)를 임명하고, 7년(660) 정월 상대등 금강이 죽자, 김유신을 임명함으로써 백제 정벌에 앞서 인사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태종무열왕은 대내적인 체제의 정비를 서두르는 한편, 대당외교에도 심혈을 기우려 즉위년부터 매년 당에 사신으로 김인문과 문왕 등의 아들들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듭 요청하였다. 당시 북쪽 요동지역에서는 고구려와 당이 생존을 건 전쟁을 치열하게 치루고 있는 사이에 한반도 남쪽 지역에서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끊임없는 혈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태종무열왕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당의 원병을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은 장춘(長春)과 파랑(罷郞)의 설화에서 읽을 수 있다. 즉 백제 원정에 나서기 7개월 앞선 태종무열왕 6년(659) 10월 당으로부터 군사요청에 대한 회보가 없자, 근심하고 있던 중 앞서 죽은 장춘과 파랑이 나타나 당군의 원병이 파견된 사실을 알려 주었고, 그에 감사한 나머지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한산주에 장의사(莊義寺)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신라와 사투를 계속하고 있던 백제의 의자왕도 당에 매년 사신을 파견하는 등의 친당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 사이의 치열한 외교경쟁에서 신라가 완승을 거둠으로써 마침내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신라가 외교적으로 승리하였던 사실은 백제의 사신에게 당 태종이 했다는 다음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전략) 지난 해(650)에 고구려와 신라 등의 사신이 아울러 입조하였을 때, 나는 그들에게 원수(怨讐)를 풀고 다시 화목을 도타이할 것을 명하였다. 신라의 사신 김법민(김춘추의 맏아들)이 아뢰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입술과 이(脣齒) 같이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략하여 오니, 대성(大城)과 중진(重鎭)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된 바가 되어 강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쇠약해졌다. 바라건대 백제에게 조서를 내리어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고, 만일 조명(詔命)을 받들지 않거든 곧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옛 땅을 얻으면 곧 화호(和好)를 요청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이 (이치에) 타당하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백제)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들을 모두 그 본국에 돌려줄 것이며, 신라도 또한 잡아간 백제의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중략) 왕이 만일 나의 처사에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의 소청에 의하여 왕과 결전할 것을 맡길 것이요, 또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곧 거란과 제번(諸藩)으로 하여금 요하를 건너 깊이 쳐들어가 약탈케 할 것이다. 왕은 깊이 나의 말을 생각하고, 스스로 다복하기를 구하고 양책을 도모하여 후회를 끼치지 말지어다.”

태종무열왕은 즉위 7년(660) 7월 당과 연합하여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키고 11월 귀환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6월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무열(武烈), 묘호를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무열이라는 시호와 태종이라는 묘호는 한식(漢式)의 제도를 처음으로 채용한 것인데, 이전 ‘중고’시기의 왕호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중고’시기의 왕호는 모두 불교에서 채용하여 이른바 ‘불교식왕명시대(佛敎式王名時代)’를 연출하였던 것에 대하여 이제 한식, 또는 유교식의 시호와 묘호를 칭하는 새로운 ‘한식시호시대(漢式諡號時代)’로 진입한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63호 / 2020년 12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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