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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차이밍량의 ‘서유西遊’(2014)

느린 걸음 속 사유의 의미, 석가세존 설법과 닮아

드니 라방의 누워있는 행위 강조해 관객의 사색 이끌어내
서쪽을 노닌다는 의미의 서유…대만 서쪽 프랑스까지 확장
서양 항구 느리게 산책하는 장면 만물이 헛것임을 일깨워

드니 라방은 와유의 방식으로 관객의 사유를 인도한다. 사진은 영화 '서유' 스틸컷.

첫 장면은 누워있는 드니 라방의 얼굴이다. 드니 라방과 얼굴 클로즈업 그리고 누웠다는 행위는 중요하다. 드니 라방은 ‘나쁜피’와 ‘퐁네프 연인들’에서 레오 카락스의 페르소나였고 퐁네프다리 위에서 ‘나에게 아무도 잊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라고 자신의 손을 권총으로 날리는 반항아다. 또한 김기덕의 ‘야생동물보호구역’에서 냉동실에 얼린 고기에 찔려 죽은 인물이기도 하다. 드니 라방이 표상하는 프랑스의 누벨 이마주 세대에 대한 성찰을 그의 흐린 시선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는 8분 이상을 누워있다. 차이밍량은 ‘동아시아에서 그림 보기를 와유(臥遊)라고 표현하고 와유는 누워서 사색하기’인 누워있는 행위를 강조한 바 있다. 드니 라방은 누워서 사색하고 누워서 그림인 영화를 바라본다. 영화의 등장인물이 스스로 움직이는 그림인 영화를 사유한다. 이것은 자기 성찰적 영화로 인도하며 영화의 주인공이 영화 속으로 관객의 사색을 이끌어주는 안내자이다. 동시에 그의 눈을 통해 드니 라방의 영화와 누벨 이마주 그리고 차이밍량의 ‘서유’(2014)를 서로 포개서 생각하게 한다. 드니 라방의 미세한 움직임은 관객들이 영화의 사유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통로이다. 드니 라방은 와유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영화를 사유하고 관객은 그의 시선과 이미지라는 문으로 영화에 대해 질문한다. 

영화 '서유' 스틸컷.

다음 장면은 거리를 걷는 이캉생이다. 그는 ‘행자’에서와 마찬가지로 붉은 법복을 입고 거리를 느리게 걸어간다. 이 장면은 느리게 걷는 프로젝트인 만주장정(慢走長征) 시리즈의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준다. 만주장정은 현장 스님이 서역에서 불경을 가져오는 ‘서유기’를 모티프로 느리게 걸으면서 빠름으로 인해 놓쳤던 부분을 다시 돌이켜보는 예술적 실천이다. ‘서유기’의 100회에 걸친 에피소드에서 어김없이 반복되는 대사는 삼장 법사(현장 스님)의 서역 여행의 취지를 뜻한다. 스님은 여정에서 만난 이들에게 “소승은 동녘땅 대당나라 황제 폐하께서 친히 파견하시어 서방 세계 천축국 대뇌음사로 살아계신 부처님을 찾아뵙고 진경을 받으러 가는 사람”으로 자신의 임무를 고한다. 천축국으로 경을 구하러 가는 현장 스님의 만행은 차이밍량의 만주장정에서 이강생의 느린 걸음으로 변주된다. 차이밍량은 서유기의 테마로 ‘행자’(2012)에서 ‘서유’까지 수편의 영화의 제작을 이어간다. 만주장정과 서유기는 긴밀하게 연관되지만 거리는 존재한다. ‘서유’의 제목은 ‘서유기’에서 유래하였지만 서쪽에서 노닌다는 의미로, 당나라 당시 서역의 천축국이었다면 차이밍량은 대만을 중심으로 서쪽인 프랑스 마르세유까지 확장하였다. 그가 당도하고 싶은 목적지는 천축국인 인도가 아니라 서양 세계로 펼쳐져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서유’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가깝다. 장자의 소요유는 내편 맨 첫 장에 자리한다. 자유롭게 노닌다는 소요유는 장자의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에서 맨 앞자리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장자의 핵심 사유로 여겨진다. 소요유는 사유가 자유와 초월의 장으로 확장돼 나아간다는 점에서 일체의 구속에서 자유로운 해탈의 과정과 연관된다. 

영화 '서유' 스틸컷.

‘서유’의 장소는 프랑스의 남쪽 지중해와 접한 항구 마르세유이다. 등장인물은 이캉생과 드니 라방이다. 이캉생은 서역이 아닌 마르세유를 느리게 걷고 있다. 마르세유는 지중해의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이지만 영화적으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대표작인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첫 장면을 촬영한 곳이자 주인공 미셀이 자동차를 훔쳐서 파리로 향하는 출발지이다.  ‘네 멋대로 해라’의 마르세유는 파리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누벨바그가 현대영화의 시작점이면 고다르는 영화 스스로 영화임을 성찰하도록 유도하는 자기반영적 영화를 실천하는 감독이었다. 고다르가 자기 성찰적 영화 실천을 통해 현대 영화의 새로운 활자를 창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차이밍량의 ‘서유’는 만주장정의 느리게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영화의 움직임에 대한 사유와 영화에서 시간은 프레임에 어떻게 정박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서로 겹친다. 고다르의 현대영화와 차이밍량의 미래영화가 마르세이유에서 만나는 장면은 영화사적으로 흥미로운 풍경이다. 

차이밍량은 현장 스님이 서역으로 경서를 구하러 갔다는 모티프를 중국의 감독이 서양으로 영화 미학을 찾아나서는 여정으로 변주해 마르세유에서 실천한다. 이캉생의 느린 걸음은 영화가 움직임을 정복했다면 그 움직임은 무엇이며 움직임이 분비하는 시간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감독의 해답을 우회적으로 제시한다. 이 방식은 석가세존께서 영축산에서 문자가 아닌 꽃으로 법을 전하는 방식과 흡사하다. 염화미소 불립문자로 알려진 전법의 상황은 ‘세존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가 오듯이 쏟아졌다. 세존께서는 드디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는데 가섭 존자가 빙긋이 미소하였다.’(무비 스님, ‘직지강설’)에 담겨있다. 꽃으로 대중에게 보이시는 석가세존의 설법과 걸음걸이로 미래영화의 시간과 움직임은 어떻게 프레임에 담아내는가를 전하는 차이밍량의 방식은 닮았다. 그리고 마르세유에 설치된 파빌리온에 비친 이미지를 180도 회전해 담아내는 장면은 ‘영화는 환(幻)이며 꿈이며 이슬처럼 사라질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 컷에서 금강경의 사구게를 자막으로 전하면서 이캉생과 드니 라방의 느린 걸음인 만주 퍼포먼스는 모든 만물이 헛것임을 일깨운다. ‘금강경’의 사구게는 ‘모든 유위의 법은 꿈과 환상과 물거품과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하여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女露亦如電 應作女是侍觀)’이다. 차이밍량은 경서를 구하러 서역에 가는 대신 서양의 항구에서 느리게 산책하면서 경서의 의미를 길어내고 있다.

문학산 영화평론가·부산대 교수

 

[1563호 / 2020년 12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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