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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의 추억

테스형이 ‘죽어도 내일은 오고야 만다’더니 올해 달력도 기어코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12월은 왠지 아쉽고 뭔가 허전하다.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2020년은 일 년 내내 너무 소란스러웠다는 기억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호흡기질환인 코로나19의 충격이 워낙 컸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작금과 같은 볼썽사나운 모습들은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저런 상념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어수선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기사와 승객들 사이에 벌어진 마스크 시비를 여러 번 목격한 뒤로는 아예 새벽 일찍 승용차를 몰고 나온다. 코로나를 핑계로 그동안 지켜왔던 작은 윤리의 실천과 어긋나는 반생태적 행동을 거리낌 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사회적 거리두기 여파로 식당 가기가 어려워지면서 집보살이 싸준 보온도시락을 꼭 챙기게 된다. 이유는 말하나 마나다. 먹는 것이 곧 사는 것이므로.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과 샌드위치로 점심과 저녁을 해결한다. 혼밥족은 누구와 또 뭘 먹을지를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다. 소음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을 습관처럼 주고받지 않아도 되는 것은 덤으로 얻은 선물이다. 이 순간만큼은 도시락을 준비하느라고 짜증이 날 만도 할 집보살의 수고로움에 대한 고마움은 까맣게 잊어버려도 좋다. 잡곡밥과 정성 가득 담긴 대여섯 가지의 반찬을 맛있게 잘 먹는 것이 우선이므로.

오랜만에 학교에서 먹어보는 도시락은 까까머리 초등학교 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나게 만든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꾀죄죄한 얼굴과 허름한 옷에 땟국물이 덕지덕지 묻어있던 동급생 친구들과 도시락을 ‘까’먹던 풍경이 불현듯 소환되었다. 무슨 수류탄도 아닌데 왜 ‘까’라는 접두사를 붙였을까.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우리는 낡은 책상을 둥글게 갖다 붙여 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도시락은 먹는 둥 마는 둥 막무가내로 떠들어댔다. 변변한 반찬을 가져온 친구는 아무도 없었지만 모두 왁자지껄 즐겁기만 했다. 가끔 여자 선생님이 교탁 뒤에서 혼자 도시락을 드시던 모습도 생각난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친구를 불러 당신이 가져온 밥과 반찬을 나눠 주시던 장면은 지금도 코끝이 찡하다. 마치 흐릿한 한 장의 흑백사진 같은 먹먹함. 일본말인 줄도 모르고 도시락을 ‘벤또’라고 부르던 희미한 기억도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니 벤또 사왔나?’ ‘그라모, 니는….’ 나도 그 친구도 우물쭈물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빈 도시락을 가져오게 해서 운동장 한쪽에 내건 가마솥에서 펄펄 끓인 옥수수 우유죽을 한 그릇씩 퍼주던 전쟁영화 속 피난민 행렬 같았던 광경도 잊을 수 없다. 거짓말 같은가.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은 1960년대 시골 어느 초등학교의 오후 일상이었으니까. 한 반의 정원이 65명 내외였다. 좁은 운동장은 넘쳐나는 아이들로 항상 붐볐다. 공차는 남자아이들과 고무줄놀이하던 여자아이들은 서로 훼방 놓지 말라고 앙앙불락하기 일쑤였다. 화가 덜 풀린 여자애들은 교실에 들어와서도 남자아이들을 노려보며 씩씩거리거나 책상 위에 엎드려 훌쩍거리고 있었다.

타임머신은 나를 다시 2020년 12월로 데려다 놓는다. 오후 5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 해는 이미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긴긴 겨울밤의 진한 어둠이 시작되려나 보다. 낡은 밤은 밝은 낮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석기시대인들은 내일 낮의 사냥을 위해 오늘 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던가. 한 해가 다 지나갔다고 너무 아쉬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세모(歲暮)라는 말은 처음부터 새해(新年)를 함축하고 있는 것을. 코로나를 빙자해 도시락을 싸달라고 하는 남자와 성가시고 귀찮아도 도시락은 싸줘야 한다고 믿는 여자. 우리 부부는 거꾸로 사이가 더 좋아졌다. 코로나의 역설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사랑 아닌 정이라면 어떻고, 살다 보니 어쩌다 생긴 의리라면 또 어떤가. 독자분들도 따뜻한 연말연시가 되시길….

허남결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hnk@dongguk.edu

 

[1564호 / 2020년 12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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