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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승가대학원장 덕민 스님

“우리 몸이 본래 공한 것인데 어디 병이 붙겠습니까?”

화엄은 문자·언어 끊어진 법계상…칭찬·비난에 속하지 않아
고봉준산에 앉아있지 말고 도심 한복판서 중생과 함께 해야
지구가 청정하고 마음도 청정하면 일체 병은 존재할 수 없어

중국 화엄종의 초조인 제심 두순(帝心 杜順, 557~640) 선사는 “화엄경을 어떻게 해야 잘 보고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제자에게 “회주(懷州)에서 소가 여물을 먹었는데 몇 천리 떨어진 익주(益州) 땅에서 말이 배가 터졌다”라고 말합니다. 화엄의 진수를 묻는 제자에게 그렇게 10조9만5048자의 알맹이 소리를 빗대어 “소가 회주에서 여물을 먹었는데 익주에서 말이 배가 터졌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법문을 들으면서 몇십 년 고뇌를 많이 했습니다.

화엄의 세계는 문자나 언어가 끊어진 법계상이기 때문에 칭찬하고 헐뜯고 그런 개재에 속하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화엄의 세계를 보아야 하는데 문자만 보고 헤아리려 하다 보니 진정한 화엄의 세계는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익주와 회주, 요즘 말로 전 세계가 통신으로 하나라는 의미가 그 법문에는 담겨 있습니다.

익주에서 말이 배가 터진 소식은 곧 생명은 절대 하나라는 것입니다. 멀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좌복 위에 앉아있는 당처를 여의지 않고 본래 그 법계상을 관(觀)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쇄골분신(碎骨粉身)해도 갚을 수 없는 것이 불조의 법문입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깨닫지 못할까요? 화엄의 세계는 ‘불’ 하고 말하면 입이 불에 타야 합니다. ‘물’ 하면 자신이 물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계는 하나, 생명은 하나, 이 가르침을 담고 있는 법문입니다.

절에 와서 우리는 ‘법성게’를 외웁니다. ‘법성게’는 ‘화엄경’의 10조9만5048자를 축약하여 의상 스님께서 짓고 법성 도표를 그려서 진언으로 승화시킨, 몇 자 되지 않는 간략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절에 들어와 강원에서 “법과 성이 원융해서 둘이 아니다”라는 말을 20년, 30년 배워도 그 뜻을 잘 모릅니다.

청량 국사께서 ‘화엄경’의 소(疏)와 초(鈔)를 쓴 것을 이제야 반산 스님이 우리말로 완간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주석을 보며 비로소 경전의 대의에 조금이나마 더 다가가게 됩니다. 법과 성이 원융해서 두 모습이 아니다, 이런 가르침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몇 년 전 김시습의 주석서를 보던 때가 떠오릅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은 무슨 뜻인가? 녹수청산이 우리의 마음이요, 우리의 마음이 녹수청산이다.’ 그 내용을 보고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어려서 절에 와서 좋은 법문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어른들의 주석을 보지 못하면 그냥 모르고 넘어가고 알 듯 모를 듯하고 맙니다. 우리는 법성의 세계를 문자나 언어로 라면 먹듯이 입에 속속 넣어주길 바라지만 이것을 실지실증에 입각해서 깨닫지 못하면 바로 문자법사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내일모레 나이 80이 가깝지만 지금도 석굴암에 걸어서 올라갑니다. 몇 년 전에는 앞에서 누군가 당겨주는 듯 몸도 가벼웠는데, 요즘은 뒤에서 누가 둘이나 매달려 저를 당깁니다(대중 웃음). 힘듭니다. 참으로 힘들어요.

하지만 이런 화두가 있습니다. “청산이 걸어가는 것이지 내가 걸어가는 것이냐?” 이 화두를 들면 다리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청산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녹수청산이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녹수청산인 겁니다. 이런 깊은 뜻을 우리가 느껴서 체득해서 깨달으면 우리 영축산에는 부처님의 영산회상의 풍류가, 이 극락암에는 소림의 곡조가 공존합니다. 요즘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숭배해오던 과학이라든가 모습과 색깔이라든가, 명상 지상주의를 내세우던 미국 문화조차도 코로나 하나에 모두 허물어집니다.

‘대방광불화엄경’ 이 일곱 글자에 세계적 제약회사들이 만들었다는 코로나19 치료제보다 더 몇십만 배, 억만 배 효험이 있는 약이, 그 처방이 들어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살릴 처방을 지금 우리 불교가 내어놓아야 합니다. 스님들이 높은 고봉준산에만 앉아있지 말고 도심 한복판의 대로에 내려와서 중생의 병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청량한 화엄의 세계를 펼쳤을 때 코로나19는 원래 없는 것이고, 우리 몸이 본래 공한 것이고, 세계가 공한 것인데 어디 병이 붙겠습니까.

오늘 영축총림에 와서 옛 도반들도 만나고 어렸을 때 극락암에서 모신 경봉 노스님 그리고 친구 명정 생각에 감회가 깊습니다. 오늘 출판기념법회를 갖는 반산 스님은 출가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왔습니다. 영민하고 똑똑한 스님입니다. 하루는 극락암에 와보니 명정 스님이 “반산이 부담스럽다. 너무 똑똑하다. 너무 똑똑해서 무섭다”라고 하길래 “스님이 방광을 잘하니까 그거 고쳐주려고 하는 거다. 반산 스님의 눈이 무서운 눈이 아니라 언젠가 큰일을 할 눈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반산 스님은 늘 공부하다 의심이 생기면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는 봉선사 월운 스님도 계시고 이 법석에 오셔야 할 무비 스님도 계십니다. 저는 간접적으로 도반같이 탁마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오늘 보니 반산 스님은 이 한 건을 하기 위해 20여 년 동안 노력에 노력을 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통도사 극락암에는 경봉 노스님의 소림 곡조가 흐르고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영축산은 그대로 화엄의 세계입니다. 영축산 계곡에 이른 봄, 눈 속에 피는 청순한 향기는 누구의 향기인가요? 영축산 오솔길의 소슬거리는 소나무 바람 소리는 누구의 입김인가요? 영축산 계곡에 달이 내려와 몸을 헹구는 그런 달은 누구의 얼굴인가요? 영축산 영마루에 외로운 소나무가 겨울 눈에 덮여 있는 그 모습은 누구의 진심인가요? 이것이 다 우리 마음의 화엄 문체입니다. 화엄의 세계를 문자로 멀리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지구가 청정하고 우리 마음도 청정하면 일체 병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본초강목에도 약이 없는 시절에 역병을 두려워하지 말고 화엄의 세계를 우리가 철저히 깨달아서 화엄 불국토를 건설해야 합니다.

경봉 노스님도 뵙고 싶고, 도반도 떠났고 이제 법당이 자꾸 허물어집니다. 몸뚱이는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런 화엄의 극진한 이치들이 마음속에 부족합니다. 늘 깨달음이 적어서 그런지 세월이 빨리 가고 아쉽습니다.

오늘 불국사에서 나오는데 낙엽이 한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종무원들이 청소해도 자꾸 낙엽이 집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쓸어도 되고 그냥 두어도 됩니다. “본래 청정해서 화엄의 세계가 한 물건이 없다”라고 하면 낙엽을 쓸고 모으는 그런 일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법계상이기 때문입니다.

염권천창호불경(簾捲穿窓戶不扃)
극진풍엽임종횡(隙塵風葉任縱橫)
노승수족수호교(老僧睡足誰呼覺)
의침상전유월명(倚枕床前有月明)

노스님은 자꾸 낙엽을 쓰는데 자꾸 낙엽은 지고 쉬었다가 낙엽을 쓸다가 낙엽 속에 꾸벅꾸벅 졸고 잠이 듭니다. 여름에 친 발은 걷어진 채로, 겨울이 아직 오지 않은 만추의 초겨울에 떨어진 창문도 그대로입니다. 마치 극락암 빗장은 치지 않은 채로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바람 부는 문틈 사이로 열반의 모습을 낙엽들이 종대로 횡대로 문틈에도 찾아오고 방에도 몰려오고 열반의 모습을 그렇게 그렇게 보여줍니다. 노승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데 그 노스님을 누가 불러서 깨워야 할까요? 꾸벅꾸벅 조는 노스님 베개 옆에 밝은 달이 찾아와서 문안을 올립니다. 낙엽도 무심, 노스님도 무심, 달도 무심, 이것이 ‘화엄경’의 색깔입니다.

저는 50년 전 경봉 노스님께 와서 “저도 명정 스님처럼 참선하겠습니다” 하니까 “너는 강(講) 하는 씨앗이야”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강 씨앗이 따로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이놈아, 너는 헛소리 말고 경을 봐라. 고봉 스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강맥을 이어야지, 선방에 오지 말아라”하셔서 나이 80이 다 되어 가는데 뼈가 부러지도록 참선 못 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노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경을 잘 봐서 경안이 열리면 그것도 초견성하는 것이다.”

반산 스님이 완간한 ‘화엄경청량소’를 오늘 불전에 봉정했습니다. 봉정식에서 책을 부처님께 올리니까 노스님께도 보은하는 것 같고 은사 스님에게도 보은하는 것 같고 저 자신도 옆에서 너무 대단하고 무척 반갑습니다. 진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 못한 것을 반산 스님이 하니까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조계종은 전통 강맥이 허물어지고 무너지는 실정입니다. 원문 강의하는 종자도 씨가 마를 것 같습니다. 반산 스님이 20여 년 동안 청량국사 소초를 번역해서 봉정하는 이런 큰 의미로 인해서 제2, 제3의 학자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떠밀려 나와 한마디를 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습니다. 모두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11월21일 영축총림 통도사 극락암에서 봉행된 ‘반산 스님 ‘화엄경청량소’ 출판기념법회’에서 덕민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1564호 / 2020년 12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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