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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중도 ⑤

기자명 박희택

문자·언어 끊어짐이 진실로 불이

법계는 양변의 대칭적인 짝이
이원으로 연기관계 맺고 있어
이원의 합일인 중도불이는
상대적인 것 넘어 절대자주

중도는 ‘유마경’ 입불이문품(入不二門品)에서 ‘불이(不二)’로 표현되고 있다. 이 품에서 31인의 보살은 저마다 대칭적[爲二] 이원상(二元相)을 개진하면서, 이를 불이법문(不二法門)으로 합일하는 이원자주(중도자주)의 안목을 보여 주고, 유마힐은 침묵으로 불이법문을 나타내었다. 보살들에게 어떻게 하여 불이문에 드는지 유마힐이 묻자, 보살들은 저마다 아래와 같은 이원의 불이를 답하였다.

먼저 (1) 법자재보살의 생-멸 (2) 덕수보살의 아(我)-아소(我所) (3) 불순보살의 수(受)-불수(不受) (4) 덕정보살의 구(垢)-정(淨) (5) 선수보살의 동(動)-염(念) (6) 선안보살의 일상(一相)-무상(無相) (7) 묘비보살의 보살심-성문심 (8) 불사보살의 선-불선 (9) 사자보살의 죄-복 (10) 사자의보살의 유루(有漏)-무루(無漏) (11) 정혜보살의 유위-무위 (12) 나라연보살의 세간-불세간 (13) 선의보살의 생사-깨달음 (14) 현견보살의 진(盡)-부진(不盡) (15) 보수보살의 아(我)-무아(無我) (16) 뇌천보살의 명(明)-무명(無明)의 불이가 차례대로 설해졌다. 

이어서 (17) 희견보살의 색(色)-색공(色空) (18) 명상보살의 사대-공 (19) 묘의보살의 안(眼)-색(色) (20) 무진의보살의 보시-회향 (21) 심혜보살의 공(空)-무상(無相)-무작(無作) (22) 적근보살의 불-법-승 (23) 심무애보살의 신(身)-신멸(身滅) (24) 상선보살의 신구의-선(善) (25) 복전보살의 복행-죄행-부동행(不動行) (26) 화엄보살의 아(我)-타(他) (27) 덕장보살의 유소득상(有所得相)-무소득상(無所得相) (28) 월상보살의 암(闇)-명(明) (29) 보인수보살의 낙열반(樂涅槃)-불락세간(不樂世間) (30) 주정왕보살의 정도-사도 (31) 요실보살의 실(實)-부실(不實)의 불이가 설해졌다.

여기까지 들은 유마힐은 문수보살에게 불이를 물었는데, (32) 문수보살은 “모든 것에 있어서 말이 없고 설함도 없으며, 가리키는 일도 인지하는 일도 없고 모든 질문과 대답을 떠나는 것이 불이의 경지에 드는 것입니다”고 답한 후, 유마힐에게 불이법문에 대해 물었다. (33) 유마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默然無言) 침묵했디. 문수사리는 문자와 언어가 끊어짐이 진실로 불이의 경지에 드는 것이다고 찬탄하고 있다.

입불이문품을 통해 중도불이의 이치를 깨칠 수 있다. 첫째, 문수보살을 제외한 31인의 보살이 드러내고 있듯이, 법계는 양변의 대칭적 짝인 이원으로 연기관계를 맺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21), (22), (25)와 같이 삼원(三元)으로 표현된 것도 이원을 개념적으로 연장한 것일 뿐이다. 둘째, 31인의 보살이 개진하는 불이법문은 그 이원상은 달라도 한결같이 공성(空性)을 직관함으로써 중도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이를테면 (8) 불사보살의 아래와 같은 언설이 공성 직관을 통한 중도불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선과 불선은 이원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도 불선도 일으키지 않는 평등하고 진실한 공(空)의 도리[無相際]를 알아서 능히 이를 깨달았을 때, 이것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중도불이는 이원의 합일(자주)을 불이이불일(不二而不一)의 관점에서 하기도 하지만, 어느 하나[一元]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3) 요실보살이 설한 “실(진실)과 부실(허위)은 이원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을 보는 사람은 실까지도 보지 않으니, 어찌 하물며 부실을 보겠습니까?”라 하여 실을 진정하게 실행하는 방식으로 중도불이를 성취하기도 하는 것이다.

넷째, 문수보살의 무(無)와 유마힐의 묵(默)에서 볼 수 있듯이, 중도불이는 문자와 언어가 끊어진 자리로서 연기의 중도진리를 깨달은 마음의 평안함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실지로 ‘유마경’ 입불이문품은 무생법인으로 마무리되고 있다(皆入不二法門 得無生法忍).

다섯째, 중도불이를 절대평등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원의 합일인 중도불이는 상대적인 것을 넘어선 절대자주이기에 모든 것을 제일(齊一)하고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자주와 평등은 호응한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564호 / 2020년 12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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